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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RD(교육)/1.경영도서요약

경영, 사람을 향해 진보하라

by 손놈이 2019. 9. 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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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영, 사람을 향해 진보하라

 

이만중 지음

고즈원 출판사

 

 

 

 

 

 

 

 

 

 

 

1부 보이지 않는 가치에 집중하라

 

유혹의 순간들과 아버지의 회초리

고향인 경기도 양주(楊洲)에서 초등학교를 다닐 때였다. 한국전쟁이 막 끝났을 무렵, 동생과 함께 집을 나서다가 집 어귀 골목에서 지금 돈으로 치면 20~30만 원쯤 되는 지폐가 떨어져 있는 것을 보았다. 그 날 저녁 밥상머리에서 아버지가 동네사람 전(全)씨의 돈을 잃어버린 일을 말씀하실 때, 밥을 먹던 동생이 무심코 형과 함께 돈을 주운 일을 말했다. 그래? 그 돈 어쨌느냐? 나는 주머니 속에서 돈을 주섬주섬 꺼냈다. 돈을 주웠으면 당연히 주인을 찾아주려고 해야지, 어찌 그 돈이 네 주머니에 들어있어. 길에서 주웠다고 그게 네 돈이야? 이놈이 도둑놈 아니냐! 그 날 내 종아리에서는 피가 터지고 회초리가 여러 개 부러져 나갔다. 내 기억에 그렇게 심하게 매를 맞아본 건 그때가 처음이었다.

 

1967년, (주)한국나일론에 입사해 1년이 조금 지났을 무렵 부산출장소 소장으로 발령을 받았다. 그때가 26살. 업무는 부산항으로 들어오는 회사의 수입물품을 보세운송하거나 통관하는 일이었다. 그런데 일을 하는 과정에 이런저런 유혹이 적지 않았다. 당시 우리 집안은 겨우 하루 세끼 굶지 않을 정도로, 그다지 좋은 형편이 아니었다. 그러나 어려운 여건 속에서도 단호하게 그 많은 유혹을 뿌리칠 수 있었던 것은 마음이 약해질 때마다 아버지의 매서운 회초리가 떠올랐기 때문이었다.

 

인생의 무형자산을 쌓다

부산출장소에서의 생활은 쉽지 않았다. 무엇보다도 독립적으로 판단하여 일해야 하는 점이 힘들었다. 그 시절 업무 관계로 만난 분들은 대개 50대 이상이었는데 이런 분들의 경험을 듣고 생각하고 실제로 적용해보다 보니 많은 도움이 되었다. 그때 업체 사장님들이나 담당자들을 그저 하청업체의 약자, 나에게 잘 보여야만 하는 사람들로 생각했다면, 아무것도 얻지 못했을 것이다. 당시 쉽게 결정하기 어려운 일은 바로 상급자 입장에서 생각하고, 그래도 어려운 경우에는 그보다 더 위에 있는 상급자의 입장에서 다시 생각했다. 그래도 결정하기 힘들 때에는 오너의 입장에서 생각했다. 이런 업무의 특성과 습관 덕에 부산출장소 생활은 내 인생의 터닝 포인트가 되었다.

 

부산출장소를 떠나 본사로 올라온 나는 원사 판매를 담당했다. 이 시절에는 실의 품질이 그다지 좋지않았다. 그래서 원사를 팔 때마다 클레임이 잦았다. 당시 코오롱은 일본 도레이 사와 기술합작을 하고 있었는데, 경영학 전공인 나는 기술은 전혀 모르는 상태였다. 하지만 내가 모르는 분야라고, 내 일이 아니라고 뒷짐만 지고 있거나 다른 이의 판단에만 전적으로 의존하기에는 마음이 내키지 않았다. 책을 사서 읽고 애프터서비스 담당자들, 때로는 일본 기술자들과 함께 우리 제품을 쓰는 공장이란 공장은 안 가 본데가 없을 정도로 그렇게 몇 년을 다니다보니 어느 틈에 나 역시 기술자가 다 되어 있었다. 4년 정도 원사 판매를 담당한 뒤 다시 원단사업부로 자리를 옮겼다. 원사 판매 때 경험한 클레임들이 원단사업부에 와서 원단을 개발하는데 그렇게 큰 힘이 되리라고는 생각지도 못했다. 그 때의 경험들이야말로 섬유공학과 출신 개발담당자들을 지휘하는 데 아주 요긴한 무기가 되어주었다.

 

옳다고 믿는다면 타협하지 마라

1976년 12월 24일 크리스마스이브, 부사장이 나를 불렀다. 기성복 사업을 하기로 결정했는데 맡아서 해보겠다는 사람도 없고 맡길 사람도 마땅치 않다는 것이었다. 나는 망설임 없이 대답했다. 제가 하겠습니다. 자네가 기성복에 대해 아는 게 뭐 있나? 뱃속에서부터 배워 나오는 놈이 어디 있습니까? 제가 잘 해낼 자신이 있습니다. 당시 코오롱은 등산 용품과 등산의류, 약간의 수영복 정도만 생산하고 있었다. 당시에는 제일모직과 반도(지금의 엘지)에서 미미하게나마 기성복 사업을 시작한 상태였다. 기성복의 기자도 몰랐기에 모든 걸 처음부터 시작해야 했다. 우선 관련 서적들을 모았다. 미국 기성복의 역사나 일본 기성복의 역사 등을 살펴보면서 하나 둘 사업의 뼈대를 세우기 시작했다. 통계청에 가서 기성복 시장의 자료도 뽑아보고 직원들에게 직접 발로 뛰며 시장조사를 해오도록 시켰다. 기성복 사업을 위한 구체적인 프레임이 하나 둘 완성되었다.

 

1개월 후, 코오롱그룹 사장단 21명과 회장님이 참석한 가운데 브리핑을 했다. 나는 기성복의 역사에서부터 현재 한국 기성복 시장의 실태와 전망 등을 상세히 설명했다. 그리고 앞으로 의류 시장은 기성복이 주도할 것이라는 점을 역설했다. 다들 진지한 표정으로 경청했다. 브리핑이 끝난 후 회장님이 물었다. 수고했어! 음, 그런데 원단은 당연히 우리 코오롱 것을 쓸 거지? 순간 나는 기운이 쏙 빠지는것 같았다. 코오롱에서 생산하는 원단이라고 해 봐야 당시에는 나일론과 폴리에스테르가 전부였다. 회장님, 소비자가 실크 달라고 하면 실크를 줘야 하고 울을 달라고 하면 울을 줘야 합니다. 기성복 사업은 우리가 팔고 있는 원사나 원단과 별개의 영역으로 보셔야 합니다. 우리 소재로만 패션사업을 하라고 하시면 저는 오늘 브리핑하는 것으로 끝내겠습니다. 회의장이 술렁거렸다. 나는 아닌 걸 예라고 말할 수는 없었다. 한동안 침묵이 흘렀다. 잠시 후, 그럼, 이 부장이 알아서 해. 오늘날 기성복시장에서 커다란 한 축을 담당하고 있는 코오롱 패션사업부는 그렇게 해서 탄생했다.

 

시장의 흐름을 읽어라

1977년 4월 1일, 드디어 패션사업본부 안에 스포츠 그룹과 숙녀복 그룹, 두 개 부서가 탄생했다. 숙녀복 그룹장으로 새로운 일을 시작한 나를 가리켜 바보라며 비아냥거리는 사람들도 적지 않았다. 이전까지 나는 코오롱에서 돈을 가장 잘 버는 원단사업부에 있었기 때문이었다. 코오롱의 패션사업본부를 발족한 지 5개월만에, 마침내 코오롱 여성 기성복 브랜드인 벨라가 탄생했다. 벨라는 나의 꿈, 아름다운 날개여 라는 CM송을 유행시키기도 한 바로 그 브랜드다. 이 시절 코오롱의 벨라보다 먼저 나와있는 브랜드들이 몇 개 더 있었는데 반도와 논노가 대표적이었다.

 

이들의 여러 제품 가운데에는 실크블라우스가 있었는데, 우리도 실크블라우스를 팔고 있었다. 다른 브랜드의 실크 블라우스의 가격은 23,000원 선이었고, 우리는 19,800원이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시장조사 결과 우리 제품이 상대적으로 적게 팔리는 것으로 파악되었다. 다른 브랜드의 실크 블라우스와 비교해도 품질도 전혀 손색이 없고 가격도 싼데 시장에서는 밀리고 있었던 것이다. 나는 가격을 올리기로 결정했다. 디자인을 약간 변화시키면서 23,800원이라는 가격표를 붙였다. 동종업계 제품 중 가장 비싼 가격이었다. 그런데 묘하게도 그때부터 실크블라우스가 잘 팔리기 시작했다.

 

시장 흐름을 읽고 고가 및 고급화에 주력한 전략이 성공한 사례였다. 시장흐름을 읽어내는 능력이 없으면 열심히 일하고도 성과를 내지 못한다. 저가로 공략할 때와 고가로 공략할 때를 알고 대처하는 것, 소비자가 원하는 것을 미리 알고 상품화하는 것 등은 끊임없이 생각하고 고민하는 속에서 동물적 본능처럼 길러진다. 보끄레가 중국시장에서 on&on과 W.을 고급 여성의류 브랜드로 각인시키는 전략을 추구한 것도 이때의 경험에서 비롯됐고, 결과는 성공적이었다.

 

조직이 열려 있어야 좋은 열매가 열린다

승진을 하면 태도가 달라지는 사람들이 있다. 본인은 달라진 게 없다고 하지만, 심할 경우 하루아침에 말투부터 행동까지 모두 확 바뀌는 사람들이 있다. 승진을 했다는 건 해야할 일이 더 많아졌다는 뜻이고 책임이 더 무거워졌다는 뜻이다. 혼자서 생각하고 결정할 일들이 더 많아졌다는 뜻이다. 그 사람 이 갑자기 범접하지 못할 어려운 존재가 되었다는 의미는 절대 아닌 것이다. 강남 사무실에서 일하던 무렵 나는 정릉에 살고 있었다. 나는 퇴근할 때마다 같은 방향에 사는 직원들을 모두 태우고 다니면서 집 근처에 하나 둘씩 내려 주었다. 직장상사의 차를 타든 안타든 그게 뭐 그리 중요한 일이야 싶을 수도 있지만 그 차이는 엄청나다.

 

예를 들어 이런 일이 있을 수 있다. 상사는 직원들과 호흡을 함께 하면서 동태와 업무를 잘 파악하고 있어야 한다. 그렇다고 매일 직원들을 불러다 이런저런 일들을 꼬치꼬치 물을 수는 없는 일이다. 상대방의 시간과 자율성을 해치기 때문이다. 그럴 때 퇴근길에 함께 차를 타고 다니면서 스스럼없이 이런 저런 이야기를 나눌 수 있다면, 개인적인 이야기나 회사일과 관련된 정보를 자연스럽게 공유할 수 있다. 상사와 부하직원 간에 열린 마음이 자연스럽게 형성되고 친밀감이 쌓이는 것이다. 꼭 차를 태워주는 경우가 아니라도 이러한 방향으로 이끌다 보면 그 조직은 자연스럽게 열린 조직으로 가게 된다.

 

 

2부 신뢰의 나무를 심어라

 

사람 위에 사람 없고 사람 밑에 사람 없다

처음 보끄레를 창립하고 몇 년 후부터 나는 강당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그리 크지 않은 규모의 회사에 대형 강당을 두는 것은 비경제적으로 보일 수 있다. 현재 사옥으로 오기 전에도 초라하지만 5층에 작은 교육장을 마련해 두고 수시로 여러 가지 교육을 실시했다. 나는 유능한 사람이 되기에 앞서 가치관이 올바른 사람이 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교육의 반 이상은 인성(人性)교육이고 나머지가 직무와 관련된 내용이다. 10여 년이 지난 지금, 우리 회사의 가족들은 과거에 비해 놀랄 만큼 긍정적인 방향으로 발전했다고 자부한다.

 

보끄레가 성장하자 점점 거래처가 늘어갔다. 요즘이야 대다수의 회사가 사용하는 표현이 되었지만 보끄레 창립 초기만 해도 협력업체라는 말은 흔히 쓰이지 않았다. 그저 하청공장이라는 말로 통했다. 그러나 나는 하청공장이라는 말을 절대 쓰지 말라고 못 박았다. 반드시 협력업체라는 말을 쓰게 했다. 하청공장이란 표현에는 상대가 나보다 아래에 있다는 의미가 깔려 있다. 나는 그분들의 도움이 있기에 우리가 일할 수 있다. 고 생각하자고 직원들에게 주문한다. 그래야만 그들을 존중하고 그들에게 감사할 줄 알게 되고 말 한마디도 공손해진다. 또 길게는 서로의 어려움을 가슴을 열고 의논할 수 있는 진정한 동반자가 될 수 있다.

 

최고의 체험이 최고의 서비스를 만든다

2002년 8월, 중국 북경의 북경백화점에 있는 on&on 매장에 들렀을 때다. 마침 중국 손님 몇몇이 옷을 구경하고 있었다. 얼마쯤 지났을까, 66 사이즈의 한 손님이 원피스를 고르더니 자신에게 맞는 사이즈의 옷을 찾아 달라고 부탁했다. 공간이 협소하여 매장에는 55 사이즈만 걸려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매장 여직원이 아무렇지도 않게 메이요우(沒有, 없습니다). 하고 잘라 말하는 것이 아닌가. 나는 깜짝 놀랐다. 분명히 창고에 있을 텐데 창고까지 가서 옷을 찾기가 귀찮은 모양이었다. 충격이었다. 중국 직원들의 서비스 정신이 이 정도인줄도 모르고 계속 방치했더라면, 중국 on&on 매장들은 성공하지 못했을 것이다. 무슨 묘안이 없을까? 획기적인 사고의 전환이 필요했다. 그들에게는 백 마디 말보다 한 번의 절실한 경험이 필요했다.

 

나는 그들에게 최고의 서비스를 체험하고 판단할 수 있는 기회를 주기로 했다. 심천매장에서 3명, 북경에서 1명, 상해에서 2명, 이렇게 모두 6명의 중국 매장 직원들을 5박 6일 일정으로 한국으로 초청했다. 공항에서부터 경영기획실담당자를 내보내 현수막을 내걸고 그들을 맞이하게 했다. 엘리베이터 안에도 중국 직원들의 이름을 일일이 적어 한국방문을 환영합니다!라고 붙여 놓았다. 회사 도착 첫날, 5박 6일간의 체험 프로그램에 대해 간략한 설명을 마친 후, 5성급 호텔인 인터콘티넨탈호텔에 여장을 풀게 했다. 품격 높은 서비스를 받아보게 하기 위해서였다. 둘째 날은 청담동의 고급 이탈리아 레스토랑에서 식사를 하도록 했다. 깔끔하게 제복을 입은 직원들이 무릎을 꿇고 손님을 올려다보며 메뉴를 골라주는 모습, 잘 모르는 메뉴를 꼼꼼하게 설명해 주는 모습, 처음부터 끝까지 미소 띤 얼굴로 대하는 모습을 보면서 그들은 놀라워했다.

 

마지막에는 자원한 직원들의 집에서 홈스테이를 시켰다. 그들은 한국 직원들과 어울려 찜질방에도 다녀왔다. 고객서비스 체험 프로그램은 성공적이었다. 한 중국 직원은 너무 행복한 시간이었어요, 평생 잊지 못할 것 같아요. 라고 했다. 한국에 다녀간 후, 중국 직원들은 고객과 눈만 마주쳐도 반갑게 인사하는 친절한 점원으로 변했다. 그때 맺은 인연으로 지금도 나는 가끔 그들과 통화를 한다. 중국으로 출장을 가면 정말이지 내 자식들보다 더 반갑게 나를 반긴다. 그 직원들은 이런 말도 했다. 다른 회사에서 월급을 두 배로 준다고 해도 절대로 가지 않겠다고, 나를 만나지 않았더라면 오늘날의 자기는 없었을 것이라 고마워한다. 그들은 나에게서 감동을 받고 나는 또 그들에게서 감동을 받는다. 우리들은 서로가 서로에게 소중하고 감사한 존재들이다.

 

(주)보끄레의 탄생 - 작은 배려가 큰 인연이 되어

보끄레라는 회사명이 무슨 뜻인지 물어보는 사람들이 많다. 보끄레는 의류 사업은 아름다움을 창조하는 작업이라는 의미에서 탄생했다. 뷰티(Beauty)'와 크리에이션(Creation)'을 합성한 말이다. 보끄레(BEAU+CRE)', 어감에서 전해지는 수줍은 듯하면서도 감칠맛 나는 무언가가 느껴지지 않는가? 1991년 보끄레를 설립해 본격적으로 의류 사업에 뛰어들게 된 데에는 코오롱 시절 잠깐 인연을 맺은 한 사람의 덕이 컸다.

 

코오롱 입사 4년째, 폴리에스터 원사 판매를 담당하고 있을 때였다. 대구에서 직물공장을 하던 업체가 있었는데 한 달에 원사를 약 20톤씩 쓰는 적지 않은 규모였다. 그런데 운영자금이 부족했던지 늘 한번에 5톤이나 10톤씩 사갈 여유가 없어 수시로 500킬로그램이나 1톤, 이렇게 소량씩 구입해 갔다. 구매는 당시 대학교 4학년인 직물공장 사장 아들이 맡았는데, 당시는 원사 구매 사정이 어려웠던 때라 소량 주문은 받아주는데가 없었던지 그는 결국 코오롱을 찾아왔다. 어려운 일은 아니었다. 실 500킬로그램을 준비해 전화를 걸면 그가 달려와 실을 사갔다. 외상도 아니었고 그저 거래를 하는 공장에 대한 기본적인 배려를 해 준 것에 지나지 않았다.

 

그러던 어느 날, 그 학생이 나를 찾아와 통장을 건넸다. 3개월을 불입한 통장이었다. 1개월 불입금이 나의 1달 월급정도였던 것으로 기억한다. 이거 가지고 계세요, 제가 매달 적금을 넣어드리겠습니다. 소량의 실을 구입해 갈 수 있도록 해준 것이 고맙고 미안했던 모양이다. 사람 잘못 봤습니다. 우리처럼 앞날이 창창한 사람들이 이래서야 되겠습니까? 이거는 가져가시고 일이나 열심히 하십시오, 내가 공짜로 주는 것도 아니잖아요? 다시는 이런 생각 마세요. 그는 얼굴이 빨개져 어쩔 줄 몰라 했다. 이후 다른 부서로 옮기면서 나는 그를 까맣게 잊고 살았다.

 

그 후 1990년 가을, 거의 20년 만에 그에게서 전화가 왔다. 코오롱 그만두셨다면서요? 무척 반가웠다. 몇 차례 만나 점심이나 저녁을 나누던 중 그가 패션 브랜드를 하자고 제의해 왔다. 당시 나는 생각해 본적이 없던 일이며 급할 것도 없어 간곡하게 거절했으나 그 친구는 고집을 꺾지 않았다. 그 날 이후 이 문제를 놓고 반년쯤 승강이가 어어졌고 결국 내가 졌다. 이렇게 해서 탄생한 것이 바로 오늘의 (주)보끄레머천다이징이다. 그는 나와 함께 지금 보끄레의 최대 주주다.

 

 

3부 스스로 인생을 경영하라

 

인재는 어떻게 탄생하는가

코오롱 패션사업본부장 시절, 고등학교 동기 동창이 한 젊은이를 추천했다. 이력서를 보니 온통 산(山)을 다닌 게 전부였다. 디자인 공부라고는 전혀 한 적이 없는데 디자이너가 되고 싶다는 것이었다. 나는 웃음이 나왔다. 그러나 대화를 나누는 동안 그에게서 남다른 열정이 느껴졌다. 그가 바로 임덕용이다. 너무도 두려워 아무도 오르려 하지 않는다는 알프스의 그 유명한 아이거 북벽을 한국인 최초로 등정했을 뿐만 아니라 히말라야의 여러 봉우리도 정복한 사람이다. 당시 가까이 지내던 새모양 복장학원 김선경 원장에게 보내 속성으로라도 기초공부를 하게 했다. 한 달이 지났을 무렵 김 원장으로부터 전화가 걸려왔다. 이 형, 이 친구 물건이 될 것 같소. 그러면서 하는 말이 하루는 그가 남대문 시장에서 군인 워커를 사 신고 오더니 수업이 끝난 후에 신발 바닥이 다 닳도록 매일같이 시장조사를 하더라는 것이었다. 그뿐 아니라 그림 솜씨도 뛰어다나고 했다.

 

그는 기대를 저버리지 않았다. 2년쯤 흘렀을 때, 그는 섬유연합회에서 주최하는 디자이너 콘테스트에서 금상을 받았다. 부상으로 국비 유학을 다녀올 수 있는 기회가 주어졌고, 이탈리아 마랑고니 디자인스쿨로 공부를 떠나게 되었다. 그렇게 떠난 그가 공부를 마치고 내게 편지를 보내왔다. 한국으로 들어와야 하는지를 묻고 있었다. 이런 경우 대부분의 한국 사람들은 돌아와 회사를 위해 일해야 한다고 강조할지 모른다. 하지만 나는 그가 더 큰 물에서 더 큰 인물로 거듭나기를 희망했다. 그는 현재 유럽의 주요 디자인 회사의 스포츠 의류 분야에서 이름난 디자이너로 활약하고 있다. 나는 이 모든 결정을 후회하지 않는다. 그는 결국 한국의 코오롱이 키워 낸 세계적인 스포츠의류 디자이너가 되었기 때문이다.

 

일본 산요와 라이선스 계약을 하고, 직원들을 파견하기로 했을 때도 마찬가지다. 그 때 일본에 보낼 직원들 가운데 Y라는 직원이 있었다. 지금은 어느 협회의 부회장이다. 당시 그녀는 코오롱의 디자인 실장이었다. 그런데 결재를 올리자 사장님이 반대했다. 보내는 건 좋은데, 일본에서 기술을 배워 온 후에 다시 코오롱에서 근무한다는 보장이 없잖아? 사장으로서는 당연한 걱정이었다. 어쨌든 그녀는 일본으로 떠났고, 2년 후 돌아왔다. 그때 나는 코오롱을 그만두고 원단업체의 사장으로 일하고 있었다. 저, 코오롱 그만두려고요. 한국으로 돌아온 그녀가 나를 찾아와 말했다. 나는 그녀를 야단쳤다.

 

내가 비록 코오롱을 떠났다고 하지만 처신을 그렇게 하면 안 되는 거야. 결국 2년 전에 사장님이 우려했던 일이 그대로 일어난 거 아닌가. 그런 결정은 나를 욕먹이는 일도 되겠지만, 훗날 후배들의 앞 길을 막을 수도 있어. 앞으로 회사에서 직원들 외국유학 보내겠어? 최소한 3년 간은 일본에서 배워온 것을 다 인계하고 가는 게 도리잖아. 그녀는 나와의 약속대로 3년을 더 근무한 후 코오롱을 그만두었다. 지금도 가끔 그때의 일을 생각한다. 만약 지금 우리 회사에서 그때와 똑같은 기회를 주어야한다면 이제는 관리자가 아니라 경영자로서 어떤 결론을 내릴까. 분명 당시의 결정과 다르지 않을 것이다.

 

능동적인 자기 헌신만이 남다른 미래를 만든다

회사 규모가 크면 부서 간 갈등이나 경쟁이 벌어지기도 한다. 코오롱시절, 대한모방이 우리 원단을 사서 쓰다가 클레임이 걸렸다. 우리 부서의 입장에서 보면 당연히 보상을 받아야 할 상황이었다. 그런데 그때 마침 계열사 코오롱엔지니어링이 대한모방의 폐수처리 시설 공사 수주 문제로 다른 회사들과 경합을 치르고 있었다. 그때 내가 제안을 했다. 우리 부서가 보상을 포기할 테니, 폐수처리 시설 설치공사를 코오롱엔지니어링에게 주십시오. 독립채산제를 채택하고 있었으므로 부서의 이득을 위해서는 당연히 손해배상을 받는 쪽을 선택해야 했다. 하지만 내가 만약 코오롱그룹 회장이라면 어떤 결정을 내렸을까. 우리가 받을 배상액보다 폐수처리시설 공사를 수주했을 때의 이득이 크다면 당연히 패션사업부의 손해를 감수하고서라도 폐수 처리 시설 공사를 택했을 것이다. 결국 대한모방의 폐수처리시설공사는 코오롱엔지니어링이 맡게 되었다. 그룹 전체의 입장에서 큰 이득이었다. 우리는 나무가 아닌 숲을 보는 시각으로 일해야 한다.

 

열정이 프로를 만든다

아니, 지금 뭐 하는 짓이에요?. 그제야 나는 깜짝 놀라 그 여자의 얼굴을 올려다보았다. 낮선 남자가 가까이 다가와 자신의 치마를 뚫어 져라 쳐다보는데, 놀라지 않을 여자가 있을까. 나는 황급히 주머니를 뒤져 명함을 꺼냈다. 정말 죄송합니다. 미리 양해를 구했어야 했는데…. 그녀는 흘낏 내 명함을 보았다. 입고 계신 한복 문양이 너무 아름다워 자세히 보고 싶은 마음에 그만…. 정말 실례했습니다. 그녀는 안심하는 듯했다. 나는 때를 놓칠세라 말을 이었다. 정말로 어려운 부탁인 줄은 알지만 이 한복을 좀 빌려 갈 수 없을까요? 제 옷을 빌려달라고요? 망설이던 그녀는 간곡한 부탁에 마침내 허락했다. 지금도 그 때를 떠올리면 정말 막무가내였다. 대문 앞에서 기다리고 있으니, 잠시 후 그녀가 곱게 갠 한복을 내밀었다. 그 한복을 참고로 굉장히 독특하면서도 우아한 원단을 개발해 냈다. 소비자들의 반응도 좋았다. 나는 후에 옷을 빌려 준 그녀에게 한복을 돌려주면서 우리가 만든 원단을 선물로 보냈다.

 

디자인의 개발은 엄밀하게 따지면 내 몫이 아니다. 디자이너들의 일이다. 그러나 회사 구성원들이 모두 이건 내 몫이 아니야. 난 내 일만 하면 돼. 라고 생각하면 그 회사는 발전하지 못한다. 주인의식이 없는 사람은 남보다 빨리 성장하지 못한다. 주인 입장으로 보면 모든 일 하나 하나를 놓칠 수 없다. 그런 마음가짐으로 일해야 눈에 보이지 않던 것들도 보이게 된다. 왜 미치면, 안 보이는 것도 보인다. 는 말도 있지 않은가. 열정이 없는 사람은 프로가 될 수 없다. 나는 가끔 우리 디자이너들에게 지나가는 말로 묻는다. 요즘 시장은 어떤가? 예, 제가 주말에 한 번 나가봤는데요…. 이렇게 서두를 시작하는 디자이너의 말은 더 이상 들을 필요조차 없다. 프로 근성이 없기 때문이다. 언제 한 번 큰 맘 먹고 나가서 시장조사를 하는 사람은 프로가 아니다. 매일 시장을 읽는다는 기분으로 살아야 한다. 열정이 없으면, 프로도 없다.

 

 

4부 성공의 개념을 바꾸어라

 

권한을 두려워하라

업무규정 등을 보면 어떤 사항은 과장, 어떤 사항은 부장, 또는 임원 전결 등 이런저런 권한과 책임에 대한 조항이 있다. 그러나 이런 규정은 실질적으로 별 의미가 없다. 담당자이면서도 사장의 권한을 행사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임원이면서도 담당자 역할밖에 하지 못하는 사람도 있기 때문이다. 직장 상사는 누구나 부하직원에 대해 나름의 기대치를 갖는다. 그런데 기대치 이상으로 일을 잘하면 그에대한 신뢰가 두터워지고, 더 중요한 일을 맡기게 된다. 그 일들도 역시 잘 해냈을 때, 상사는 웬만한 일은 스스로 알아서 처리하라고 권한을 주게 된다. 그러면 직위는 낮더라도 해당 업무영역에서는 사장과 다를 바가 없다.

 

코오롱에서 패션 사업을 시작할 때, 나는 당돌하게도 사장님께 내 부서의 인사권을 포함한 모든 권한을 위임해 줄 것을 요청했다. 윗분들도 패션 분야에 대한 경험이 전혀 없었기 때문에 잘 알지 못하면서 이런저런 간섭을 하게 되면 일만 더뎌질 것이기 때문이었다. 제 사표는 항상 사장님 서랍 속에 있습니다. 제가 계획을 말씀드리고 그것에 동의하시면 그 후에는 결산서만으로 저를 평가해 주십시오. 제대로 못 해서 못 믿겠다 싶으시면 언제라도 서랍 속 사표를 수리하시면 됩니다. 나는 비장한 각오로 전권 위임을 요구했다. 물론 전권을 위임받은 후에는 엄청난 스트레스와 고민을 경험해야 했다.

 

자다가도 깜짝 놀라 깨고 잠을 설치다 못해 일주일이고 열흘이고 불면증으로 고생한 적이 한 두 번이 아니었다. 말 그대로 일에 미쳐 살다 보니 3년이 훌쩍 지나 버렸고 그동안 사장님과의 약속도 큰 차질 없이 지켜졌다. 숙녀복 그룹도 흑자로 전환됐고, 본부장도 되었다. 패션사업을 도맡아 추진하던 그때, 내 뜻대로 의사 결정을 하고 책임지는 훈련을 한 것은 이후 여러모로 내게 귀중한 경험이 되었다. 권한을 주는 것도 힘들지만 받는 것도 힘들다. 권한을 두려워할 줄 아는 사람만이 권한을 누릴 자격이 있는 사람이다. 권한은 최선의 노력과 좋은 결과를 담보로 주어지기 때문이다.

 

성공과 실패는 1.6퍼센트 차이

어느 과학자가 발표한 게놈구조 분석 결과를 보면 인간과 침팬지의 차이는 불과 1.6퍼센트뿐이라고 한다. 다시 말해 인간과 침팬지가 98.4퍼센트 일치한다는 말이다. 이때의 1.6퍼센트 수치는 얼마나 작은 수치인가? 이 미세한 차이로 한쪽은 인간이 되고 다른 한쪽은 침팬지가 된다니 말이다. 성공하는 사람과 실패하는 사람의 차이도 이렇듯 아주 작은 데 있다고 생각한다. 사소해 보이는 작은 차이가 성공과 실패를 결정짓는 단서가 된다. 성공하는 사람에게는 평범한 사람들과는 무언가 다른 점이 있는데, 그것은 드러나지 않는 사소한 행동이나, 말투, 표정일 수도 있다. 보이지 않는 곳에서도 최선을 다하는 태도나 늘 정확한 목표를 갖고 행동하는 습관 등 그들에게는 그들만의 특별한 무엇이 있다. 아무리 어렵고 힘든 일이라 할지라도 열정적으로 최선을 다하는 자세야말로 성공하는 사람들의 특별한 습관이 아닐까.

 

일단 닥친 역경은 절대로 피할 수 없다. 누군가가 대신 앓아 줄 수도 없다. 그렇다면 어떻게 그것을 헤쳐 나가야 할까. 온몸으로 역경을 껴안고 뒹굴기, 그것이 해결책이다. 그러다 보면 어느 순간 눈앞이 환해진다. 그때가 바로 역경을 이겨 낸 승리의 순간이다. 역경 없는 성공은 없다. 역경이란 성공적인 삶을 위한 통과의례일 뿐이다. 역경 속에서 인간은 겸손을 깨닫고 지혜를 얻게 되며 인내를 배운다. 역경이야말로 스승이다. 역경을 기꺼이 받아들이고, 더 나아가 즐길 수 있다면 그 사람이 진정한 강자다.

 

 

5부 아름다운 리더를 기다리며

 

보끄레에는 현재 인턴 과정을 통해 입사한 10여 명의 신입사원이 있다. 이들은 입사한 지 2년 정도되었다. 인턴과정에서 적극성이나 활동성을 포함한 여러 요건을 테스트해 본 뒤 최종적으로 선발한 사람들이다. 이들은 나의 일대일 관리 아래서 장차 CEO가 될 수 있는 자질을 키워 가기 위한 프로그램을 수행하고 있다. 앞으로 CEO가 되려면 최소한 3개 국어 이상은 능숙하게 구사해야 한다. 지구촌 시대에 외국어는 선택이 아닌 필수다. 그리고 각자의 분야에서만 최고가 되어서는 안 된다. 법을 전공한 사람도 경영을 알아야하고 디자인을 알아야 한다. 즉 CEO는 모든 분야를 두루 깊이 있게 알고 있어야 한다.

 

나의 인재양성 프로그램은 급속히 변하고 있는 기업 환경에 대응하기 위한 대비책이기도 하다. 이미 다른 분야에서는 많은 회사들이 소(小)사장 제도를 도입하고 있다. 한 회사의 울타리 속에 여러 명의 사장을 두고 각자에게 전권을 위임하는 것이다. 이 일을 책임지고 맡아서 해 봐. 라고 말했을 때, 망설임 없이 맡아서 해낼 수 있는 자질을 갖춘 사람이야말로 그 회사의 작은 CEO다. 뭐하러 그렇게까지 하느냐고 반문하는 사람도 있다. 공들여 봤자 사표 내고 떠나면 그만 아니냐는 것이다. 그러나 떠날까 두려워 인재를 양성하지 않는다면 그야말로 구더기 무서워 장 못 담그는 것과 무엇이 다르겠는가? 설령 회사를 떠난다 해도 우리 사회 어딘가에서 각자 재능을 마음껏 펼칠 수 있다면 뜻있는 일 아닌가?

 

해를 거듭할수록 국제적 비즈니스에 대한 마인드와 전문지식을 갖춘 인재가 필요하다. 이런 저런 경영자 모임에 나가보면, 고학력자는 넘치는데 마땅히 쓸만한 인재가 없다며 불평하는 기업인들이 적지 않다. 인재는 어느 날 갑자기 완성된 형태로 나타나지 않는다 .나무를 키우듯 정성들여 하나하나 만들어 가야 한다. 인재는 키워지는 것이다. 나는 왜 일하는가? 돈을 벌기 위해 일하는가? 아니면 일 자체를 사랑하기에 일하는가? 같은 일을 하더라도 어떤 생각으로 그 일을 대하느냐에 따라 궁극적으로 두 삶은 엄청난 차이가 나게 된다. 전자에 해당하는 사람들이 많으면 나라의 앞날은 어두워질 수밖에 없다. 반면 일에 대해 건강한 생각을 지닌 사람이 많은 나라가 바로 선진국이 아니겠는가?

 

나는 보끄레 직원들을 피고용인이라고 생각해 본적이 없다. 그들은 내 가족이다. 그래서인지는 모르겠지만 어떤 직원들은 나를 아버지 혹은 아빠라고 부른다. 특히 중국 매장의 중국인 여직원들은 나를 한국아빠라고 부른다. 우리 회사 분위기를 잘 모르는 사람들에게는 좀 황당하게 들릴 것이다. 그러나 어디 이런 일이 내가 강요한다고 되는 일인가. 또 그런 호칭을 듣고 싶어서 가족처럼 대하는 것도 아니다. 어떨 때는 직원들의 스스럼없는 아버님 소리에 오히려 내가 더 쑥스러울 때도 있다.

 

1990년대 중반 내 나이도 쉰을 훌쩍 넘긴 어느 날, 모처럼 한가한 시간을 맞았다. 창밖을 내다보다 문득 짧다면 짧고 길다면 길었던 지난날의 삶을 돌아보았다. 갑자기 회한이 밀려들었다. 지난 50여년은 오로지 나와 내 가족을 먹여 살리기 위해 살아온 삶이었구나. 짐승도 새끼를 낳으면 그들을 끔찍하게 돌보는 것을…. 겨우 짐승처럼만 살아왔단 말인가? 그동안 남을 배려하며 최대한 바르고 성실하게 살았다고 자부해 왔는데 돌이켜 보니 그것은 커다란 오판이었다. 순간 부끄러움과 한편으로는 다행이다 싶은 안도감이 교차했다. 그래, 아직 20여 년쯤은 남아 있지 않은가? 7,80이 돼서 깨달았다면 시간을 돌이킬 수도 없었을 텐데…. 후회스러운 마감을 할 뻔했구나.

 

짐승과 다른 인간다운 삶이란 과연 어떤 것일까? 며칠동안 곰곰이 생각해 보았다. 나와 내 가족 그리고 가까운 친구들만이 아닌 나와 아무런 관계가 없는 사람들에게도 작게나마 힘닿는 대로 관심과 배려 그리고 사랑을 베풀며 살아가고자 노력하는 것, 그것이 바로 인간다운 삶이 아닐까 싶었다. 그러자면 내 생활도, 회사의 경영원칙도 무언가 달라져야 할 것이었다. 그 날 이후, 사옥이 있던 관할구청을 통해 생활이 어려운 이웃들을 소개받을 수 있었다. 그리고 길동으로 옮긴 후에는 강동구청에서 몇몇 어려운 이웃들을 소개받았다. 장학금 지원, 야학 운영, 자원봉사 활동 등이 바로 이런 취지에서 시작된 일이었다. 꼭 큰돈이 있어야 하는 것은 아니었다. 중요한 것은 마음이었다.

 

 

6부 너와 내가 아닌 우리를 위해

 

우리는 글로벌 빌리지(global village)에서 글로벌 시티즌(global citizen)으로 살아야 하는 시대를 살고 있다. 글로벌 마케팅, 글로벌 소싱을 하며 세계의 브랜드들과 무한경쟁을 벌여야 하는 상황이다. 국경을 넘나들며 비즈니스를 한다는 것은 생각만큼 간단하지도 않고, 도처에 도사리고 있는 수많은 위험도 감내해야 한다. 이때 비슷한 분야에서 일을 하는 기업들이 서로의 경험과 노하우를 공유할 수 있다면 그만큼 리스크를 줄일 수 있을 것이다. 지금 일등 하는 기업이 반드시 일류회사는 아닐 것이다. 또 그 기업이 계속 일등 하리라는 보장도 없다. 나는 일등기업보다는 일류기업을 만들고 싶다. 그러려면 기업에 반드시 무언가 다른 정신세계가 있어야 한다. 기업의 가치는 기업 활동으로 그 사회에 얼마나 공헌할 수 있느냐에 달려 있다. 그것이야말로 기업이 사회에 존재해야 하는 이유다. 건전한 기업문화가 정착되면 정신적으로 자성능력이 생겨서 그것이 기업 발전의 엔진 역할을 하리라 믿는다.

 

문화란 눈으로 볼 수도 없고 손으로 만질 수도 없지만, 이 무형 자산은 거액의 자금 이상의 가치를 지닌다. 그래서 나는 늘 직원들에게 다음과 같이 말한다. 첫째, 가치를 아는 회사가 되자. 다소 미련해 보이는 삶의 가치, 최선을 다하는 삶의 가치, 겸손한 삶의 가치, 지금 당장의 가치와 미래의 가치, 정직과 성실의 가치, 남을 배려하는 사람의 가치 등을 올바르게 이해하는 회사가 되자. 둘째, 배우며 일하고 일하며 배우는 회사가 되자. 셋째, 신뢰를 모든 것의 기초로 삼는 회사가 되자. 넷째, 일등보다는 일류를 지향하는 회사가 되자. 다섯째, 사회에 공헌하는 회사가 되자.

 

한국인들끼리 경쟁하던 시대는 지났다. 세계인들을 상대로 경쟁해야 한다. 나는 늘 직원들에게 새로운 지식을 쌓는 일에 소홀해서는 안 된다고 강조한다. 우리 회사 직원들도 처음에는 어휴, 일도 바쁜데 무슨 교육이야. 라며 짜증을 내기도 했다. 하지만 2년 정도 지나자 스스로 교육의 중요성을 깨닫게 되었다. 자기 계발을 하지 않으면 결국 도태된다는 사실을 자각하게 된 것이다. 교육으로만 인재가 만들어지는 것은 아니다. 나는 회사 내의 각종 동호회 활동도 적극 지원한다. 우리 회사에는 등산이나 낚시, 영화, 식도락, 사격, 래프팅, 자원봉사 활동 등의 동호회 모임이 활성화되어 있다.

 

동호회의 활동경비 또한 일정액을 회사에서 부담한다. 회사 내에서 업무적으로 만나던 관계에서 벗어나 취미활동이나 자원봉사 등을 함께 하면 여러모로 장점이 많다. 직원들끼리 협조가 잘되고 개인과 개인의 벽, 또는 부서와 부서의 벽이 없어진다. 인재를 교육하고 육성하는 일은 결코 소홀히 해서도 안 되고, 인재를 개발하는 데 드는 비용을 아까워해서도 안 된다. 그들은 단순히 돈 주고 부리는 일꾼이 아니라 우리 회사를 세계시장에 우뚝 세울 소중한 자원이며, 동시에 우리나라를 강대국으로 만들 인재들이기 때문이다.

 

한국개발연구원(KDI)에 따르면 17개 부문 제조업의 경쟁력을 비교한 결과, 한국이 우위를 보이고 있는 산업은 6개, 중국은 7개, 일본은 9개였다. 그러나 시간이 흐를수록 한국의 경쟁우위 산업은 계속 줄어들 수 있다는 전망이 나오고 있다. 10년 전만 해도 한국은 8개 부문에서 우위를 점하고 있었다. 한국산업연구원의 조사결과, 중국과 한국의 기술 격차는 불과 4년 정도라고 한다. 이럴 때일수록 국가가 여러 가지 전망과 대안을 제시하고 정책적으로 기업을 지원하는 등 많은 노력을 기울여야 한다. 그러나 이보다 더 중요한 것은 바로 작은 애국심이다. 조금이라도 나라를 사랑하는 마음이 있다면 나 혼자 잘 먹고 잘살겠다고 다른 나라에 기술을 팔아먹지는 않을 것이다. 기술 유출은 나라 전체의 미래를 내다 파는 것과 같다.

 

역사적 관점에서 볼 때 국가적으로 지금이 가장 중요한 시기일지도 모른다. 이러한 중요한 시점에 반 기업 정서나 돈 있는 사람이 죄인 시 되는 사회 분위기가 팽배해진다면 우리나라의 성장 동력은 힘을 잃게 될 것이다. 삼성이나 현대자동차 같은 기업은 세계적 브랜드로 그 위상이 대단히 높다. 오늘날 삼성은 어느 한 개인의 기업이 아니다. 대한민국 국민의 기업이다. 삼성이 만든 휴대전화 하나가 지난 세기 개발도상국이라는 한국의 이미지를 씻어 버리고 IT강국이라는 선진국의 이미지를 전 세계인들에게 심어주었다. 특정기업에 대한 부정적 인식과 반대여론이 확산되면 어떻게 될까. 살아남아야 하는 기업의 생리를 감안할 때, 결국 해외에 둥지를 틀 수밖에 없다. 기업인들이 기업하기 좋은 환경에서 정말로 열심히 일만 하는 것. 그것이 가능해 진다면 한국 브랜드는 세계 속에서 그 빛을 발하고, 외국 기업들에 대해서도 경쟁력을 갖추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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