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부도둑
본 풀이
도시에 살다보니 이사를 자주 다니는 편인데, 그때마다 내게는 신경 쓰이는 물건이 몇 가지 있다. 그 중 하나가 증조부 때 만들어놓은 우리 집 가첩(家牒)이다. 표면에 누렇게 기름을 매긴 한지 20여 장 분량의 필사본으로 그 크기가 어정쩡하여 도무지 둘 자리가 마땅하지 않다. 그래서 대개는 어디 깊숙한 서랍 밑바닥에 따로 놓았다가 이사 때가 되면 꺼낸다. 이제는 복사본도 넉넉히 만들었고, 우리말 번역본도 대략 하나 꾸며서 돌려보기에 한결 마음이 놓이지만, 그래도 원본이 제일 소중하지 않겠는가? 내용이라야 별 대단한 것이 아니다. 인동(仁同)장씨 족보에서 추린 우리 직계 조상들의 계보와 내 5대조의 행적을 중심으로 한 우리 집안 이야기가 좀 들어 있다. 그 가운데 이런 이야기가 나온다.
아버지의 병세가 위독했다. 백약이 무효였다. 당시 13세이던 소년은 낮이면 약을 달여 드리고 밤이면 엎드려 하늘에 아버지의 회생을 빌었다. 이렇게 하기를 삼칠일(三七日)이 되던 날 밤 삼경에 홀연히 정신이 몽롱해지며 산곡으로 가고 싶은 마음이 들었다. 칼날 같은 바람이 살을 베는 듯했고 칠흑 같은 어둠에 지척을 분간하기가 어려웠다. 그런데 앞에 커다란 물체 하나가 어른거렸다. 가만히 들여다보니 큰 호랑이였다. 잔뜩 경계하는데, 호랑이는 오히려 고개를 숙이고 꼬릴 흔들며 부르는 듯 멈칫멈칫 앞서 걸어가는 것이 아닌가. 호랑이를 따라 어느 바위 아래 이르니 약 한 봉지가 놓여 있었다. 이를 아버지께 드려 복용케 했더니 그날로 병이 나으셨다.
이 무슨 호랑이 담배 피우던 시절의 이야기인가 하겠지만 사실은 그리 오래된 이야기가 아닌 내 증조 할아버지(載相, 1882~1947)가 당신의 할아버지(錫兄, 1835~1895)에 대해 기록한 내용이다. 이 가첩은 1931년, 그러니까 태어나기 7년 전에 만들어졌다. 내 증조부는 족보와는 별도로 자신의 직계만을 중심으로 하는 가첩을 마련하여 내 5대조 이후 우리 집안의 내력을 좀더 소상히 알리려 한 것인데, 이 믿기 어려운 이야기를 거기에 써놓았다.
나의 할아버지는 12세, 할머니는 15세 때 결혼하셨다. 당시 우리나라에는 조혼 관습이 있기는 했으나 내 할아버지의 경우는 그것이 좀 심한 편이다. 이렇게 결혼하신 지 3년 만에, 그러니까 할아버지가 15세 되던 해에 장남인 내 아버지를 낳으셨다. 그러니 아버지와 할아버지는 열다섯 살밖에 차이나지 않는다. 그만큼 조혼이 흔하던 시절이었는데도 나이 스물이 채 될까 말까 한 사람에게 대 여섯 살 되는 아이가 아버지라고 부르는 것이 남 보기에도 좀 창피했던지 다른 사람 앞에서는 절대로 아버지라 부르지 말라는 엄명이 내려졌다고 한다. 나의 아버지(世善, 1918~1973)는 샌님에 가까운 성품이었다. 타고난 야생마인 할아버지와는 달리 무척 조용하며 수줍어하고 글읽기를 좋아했는데, 이것이 할아버지에게는 썩 탐탁한 것이 아니었다. 아버지는 집에 초빙되어 가르쳤던 이우영 선생의 중매로 경주 이씨 집안에서 아끼는 규수와 혼인했다. 이 선생님의 말만 듣고 혼인을 결정했던 두 당사자는 당시 관례대로 혼례식 자리에 와서야 비로소 서로 처음 마주 보았다. 이듬해 범띠해인 무인년(戊寅年) 정월스무엿새(양력 1938년 2월 25일) 새댁은 아들을 낳았다. 이렇게 내가 세상 빛을 보았다.
인삼과 산삼
사람이 시련을 겪어야 한다는 말은 흔히 듣는 말이다. 그런데 잘나가던 나에게 다른 것도 아닌 학업과 관련한 시련이 닥칠 줄은 꿈에도 몰랐다. 1950년 당시 학제 변경에 따라 6월에 학년이 바뀌었고, 나는 그때 막 6학년으로 올라갔다. 그러자 곧 6.25 전란이 시작되어 우리 가족은 오천 고향집으로 돌아갔다. 그런데 할아버지가 나를 학교에 아예 다니지 못하게 한 것이다. 학교에만 가지 말라는 것이 아니라 집안 일꾼들과 들에 나가 일하라고 하셨다. 청천벽력 같은 일이었다. 도무지 이유가 없었다. 이러한 조처는 교육에 대한 장기적 포석으로 우선 역경을 거치게 해 단련을 시키겠다는 계책으로 볼 수도 있다. 제대로 사람을 만들려면 온실에서만 길러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그런데 내 할아버지가 정말 그러한 큰 뜻으로 그러셨느냐 하는데 의문이 많다. 그만큼 높은 교육적 식견을 가지고 사신 분이 아니기 때문이다. 하지만 당시 이분의 의중에 무엇이 들어 있었느냐 하는 것을 지금 이 자리에서 어떤 방법으로 헤아리겠는가. 이러한 점에 관련하여 우리나라 옛 선비인 사숙재(私淑齊) 강희맹(姜希孟, 1424~1483) 선생이 쓴 「도자설(盜子說)」에 아주 적절한 이야기가 나온다.
도둑질을 업으로 삼는 아비와 아들이 있었다. 어느 날 밤 아비 도둑은 아들을 데리고 어느 부잣집에 들어갔다. 아들을 보물창고로 들어가게 하고는 아들이 보물을 챙기느라 정신이 없을 때쯤 밖에서 문을 닫고 자물쇠를 건 다음 주인이 들을 수 있게 자물통을 흔들어댔다. 주인이 달려와 쫓아가다 돌아보니 창고 자물쇠는 그대로 잠겨 있었다. 주인은 방으로 되돌아갔지만 아들 도둑은 창고에 갇힌 채 빠져나올 방도가 없었다. 그래서 손톱으로 박박 쥐가 문짝을 긁는 소리를 냈다. 주인이 소리를 듣고 창고 속에 쥐가 들었나보군. 물건을 망치겠다. 쫓아버려야지 하고는 등불을 들고 나와 자물쇠를 열고 살펴보려는 순간 아들 도둑이 쏜살같이 빠져나와 달아났다. 주인집 식구들이 쫓아오자 그는 연못가에 큰 돌을 빠뜨리고, 사람들이 도둑이 물속으로 뛰어들었다 고 하며 그곳을 살피는 동안 그 집을 빠져나갔다. 집에 돌아온 아들은 아비에게 새나 짐승도 제 새끼를 보호할 줄 아는데 제가 무슨 큰 잘못을 했다고 이렇게 욕을 보이십니까? 하고 원망했다. 그러자 아비 도둑이 말했다. 남에게 배운 것은 한계가 있게 마련이지만 스스로 터득한 것은 그 응용이 무궁한 법이다. 더구나 곤궁하고 어려운 일은 사람의 심지를 굳게 하고 솜씨를 원숙하게 만드는 법이다. 네가 창고에 갇히고 다급하게 쫓기지 않았던들 어떻게 쥐가 긁는 시늉을 내고 못에 돌을 던지는 꾀를 냈겠느냐. 이제 지혜의 샘이 트였으니 다시는 큰 어려움을 당하지 않을 것이다. 너는 이제 천하의 독보적인 존재가 될 것이다. 후에 과연 아들은 천하제일의 도둑이 되었다.
사실 강희맹 선생이 도둑 이야기를 했지만 나 또한 도둑이기는 마찬가지다. 나는 단지 남의 창고에 들어가 물건을 훔쳐내는 도둑이 아니라 학문의 창고에 들어가 앎을 훔쳐내는 도둑일 뿐이다. 그런 점에서 나를 규정하는 가장 적절한 표현이 있다면 앎 도둑, 조금 좋게 말해 공부꾼이라 할 수 있다. 그 무렵에도 벌써 내가 작은 공부꾼 자질을 보였지만 그로부터 반세기가 훨씬 더 지나간 지금도 여전히 공부꾼 이외에 달리 내 자신을 드러낼 적절한 표현이 없다. 하지만 그 무렵 초등학교를 중퇴시킨 할아버지의 처사는 내 학습의욕을 단련시키려는 더 큰 의미의 교육과정이 아니라 아예 학습의욕을 버리고 교육을 접으라는 단호한 명령이었으므로 나로서는 이에 맞서 싸워 이기든지 아니면 공부의 길에서 완전히 탈락해 영구히 초등학교 중퇴의 삶을 살아가든지 해야 하는 절체절명의 투쟁이었다. 그러나 단호한 할아버지 때문에 결국 나는 1년 동안 학업을 중단하고 산으로 들로 일하러 다녔다. 또래 아이들이 모두 학교로 가는데 나 혼자 나무 지게를 메고 산에 올라가 그 아래 학교를 내려다보며 나무해야 하는 심정은 당해보지 않고는 이해하기 어려울 것이다. 세상이 다 앞서 나가는데 나 혼자만 뒤로 물러서 처진 것 같은 암담한 기분이 들었다. 하지만 그저 내게 주어진 제한된 여건 아래 내가 할 수 있는 그러면서도 되도록 하고 싶은 것을 골라 하면서 사는 길밖에 다른 방법이 없었다.
그렇게 긴 1년이 지나고 내 학년 또래 다른 아이들은 모두 학교를 졸업했다. 그러나 초등학교를 졸업하지 않은 나는 중학교에 보내줄 사람도 없었지만 누가 보내주고 싶더라도 우선 국가시험에 응시할 자격부터 없었다. 그런데도 아직 한 가지 남은 길이 있었다. 다시 고등공민학교 진학을 시도하는 일이었다. 이때 60여 명이 입학했는데, 입학시험에서 나는 수석으로 합격했다. 그러나 전쟁 때문에 학교교육은 말이 아니었다. 그렇게 1년이 지나고 2학년이 되던 해 아버지는 다시 도망치듯이 집을 떠나셨다. 얼마 후 충북 음성군 감곡면에 있는 수리시설 공사현장에서 일하게 되셨다는 연락은 왔으나 공식적으로 우리에게 오라는 이야기는 없었다. 어머니는 이제 떠나야 할 강력한 구실을 찾았다. 내 교육문제였다. 이렇게 두면 죽도 밥도 안 된다는 것이었다. 이번에도 가벼운 제동이 걸렸으나 어머니는 강경하셨다. 그래서 1952년 6월, 나와 어머니 그리고 남녀 동생 한 명씩 이렇게 네 식구가 느닷없이 감곡 아버지 계신 곳으로 들이닥쳤다. 이로써 나는 짧고도 긴 2년 동안의 고향 거주를 마치고 다시 불확실한 미래를 향해 새로운 항해에 들어섰다.
사실 후다닥 떠나기는 했으나 막상 내 교육을 어떻게 이어갈지 막막했다. 내가 들고 가서 내밀 수 있는 서류라고는 호명고등공민학교 1학년 말 성적통지서와 2학년에 몇 달 다녔다는 재학증명서가 고작이었다. 당시 감곡에는 정규 중학교로 감곡중학교가 있었다. 문제는 이 학교에서 나를 받아줄까 하는 것이었다. 내가 지닌 하나의 강점은 고등공민학교 1학년 성적표에 60여 명 가운데 석차가 1위로 기재되어 있다는 점이었다. 그런데 다행히도 이 학교는 유연성이 좀 있었다. 당시 피난민이 많아 특히 서울 지역과 전출입이 많았다. 결국 나는 학교에서 요구하는 시험을 치고, 운 좋게도 2년 전에 놓쳐버린 버스를 되찾아 올라탈 수 있었다. 이것으로 내 2년간의 야외생존훈련은 일단 끝났다. 도둑의 상황에서 보면 이제 갇혔던 창고에서는 용케 벗어나 일단 큰길로 들어선 셈이었다. 그 후 나는 청주공업고등학교 기계과에 진학했는데, 일찍부터 이런 쪽으로 가서 빨리 좀더 깊이 공부해보겠다는 생각이 많았고, 아버지가 늘 수학과 과학에 관심을 가지고 계셔서 그 속에 어떤 신비한 내용이 담기지 않았나 하는 생각 때문이었다. 그리고 그곳에는 벌써 기계과·전기과 등 학과 구분이 있어서 한층 어른스러워 보였다. 하지만 어머니는 반대했다. 기름때 묻은 옷 입고 다니는 게 별로 반갑지 않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아버지는 일단 네가 하고 싶은 것을 해야 한다 는 자세였다.
넷째 마당 _ 교실 안과 밖
새옹지마(塞翁之馬)라는 말이 있듯이 지금 되돌아볼 때 가령 내가 세칭 일류 고등학교로 진학했을 경우와 비교해보더라도 청주공고에서의 내 교육은 그다지 나쁜 것이 아니었다. 특별히 내 경우에는 담임선생님의 특별 배려로 수학과 영어를 남달리 깊이 학습할 수 있었고, 학교수업 부담이 상대적으로 가벼워 내 나름의 활동을 많이 할 수 있었던 것이 장점으로 꼽힌다. 하지만 입학한 지 얼마 지나지않아 나는 학교를 잘못 선택했구나 하는 생각을 많이 했다. 그 이유는 입학 전에 내가 기대했던 것과 너무 많이 달랐기 때문이다. 그 하나의 사례가 과학 관련 수업이다. 나는 사실 당시 공업고등학교를 요즘의 과학고등학교 정도로 여기고 지원했지만, 공교롭게도 우리가 물리 수업을 겨우 한두 주 받았을 무렵 물리 담당 교사가 다른 곳으로 전직하여 물리 수업을 거의 듣지 못했다. 뒤늦게 거의 졸업할 무렵 어느 분이 맡기는 했으나 그때는 이미 내 교육과는 실질적으로 무관한 상황이었다.
입학 당시 이러한 기대뿐 아니라 좀더 절실한 현실적 과제는 이것이 내 대학입시와 맞물려 있다는 점이었다. 당시 나는 공과대학으로 진학하려고 생각했는데, 여기에는 물리학 과목이 필수여서 어떻게는 물리학 공부를 해내지 않으면 안 되었다. 그래서 우리 학교 교재였던 『물리Ⅰ,Ⅱ』권을 혼자 읽어나가기 시작했는데 이게 어찌된 일인지 이 두 권이 아주 쉽고 재미있게 읽히지 않는가? 어쨌든 이것으로 나는 다시 물리학에 대한 흥미와 자신감을 얻게 되었다. 이는 학교 상황이 그렇게 만들어준 측면도 있지만 더 중요한 이유는 과거 야생 경험을 통해 익힌 독자적 학습능력이 주효했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결국 아주 어려서 익힌 독자적 학습능력은 다시 독자적 학습경험을 낳게 하고 이것이 다시 독자적 학습능력을 강화하는 방향으로 상승작용을 일으킨 것이다. 그러나 내가 만일 일류 학교에 가서 주로 수동적 교육을 받았더라면 이러한 독자적 학습능력이 오히려 감퇴되고 득점 위주의 평범한 학습 습관에 매몰되었을 가능성이 크다. 결국 나는 다행스럽게도 제도권 교육에 들어섰으면서도 자의반 타의반으로 여전히 야생의 상황과 비슷한 여건에 놓이게 되었고, 이것이 다시 내 야생성을 더 강화하는 쪽으로 치닫게 했던 것이다.
드디어 대학을 선정해야 할 때가 왔다. 학교는 일단 서울대학교로 정했는데 문제는 무슨 학과에 지원할 것인가 하는 점이었다. 처음에는 내가 공고 기계과 학생이었던 만치 3학년이 거의 끝나갈 무렵까지도 공과대학 기계공학과로 가는 것이 당연하다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막판에 생각이 바뀌었다. 아무래도 학문의 성격으로 보아 물리학이 가장 깊이 있는 학문으로 보인 반면, 기계공학은 내가 처음 생각했던 것만큼 그렇게 썩 내 적성에 맞는 것이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문제는 그 다음부터였다. 주변에서는 심지어 아버지까지도 만류하고 나섰다. 당시 담임선생님 논평은 딱 한마디, 너, 거기 가면 춥고 배고파 였다. 이분 말씀을 흘려들을 수 없는 것이, 이분 자신이 한때 물리를 진지하게 공부해보고 싶어 애썼던 분이어서 물리에 대한 식견이 무척 넓었다. 나도 좀 막막하다는 생각은 들었다. 제 먹을 것은 제 손으로 해결할 수 있어야 한다는 철학을 확고하게 가지고 있었는데, 아무리 생각해도 물리학을 해서 먹을거리가 나올 것 같지가 않았다. 그러나 되도록이면 응용물리학에 관심을 기울여보겠다는 것으로 아버지를 설득하여 동의를 얻었다. 어머니는 사실 물리학이 무엇인지 전혀 감이 없으셨기에 그저 기름때 묻은 옷은 안 입지 않을까 하여 안도하시는 모습이었다.
다섯째 마당 _ 방황과 모색
서울대학교 문리과대학 물리학과라는 것은 내게 꿈 그 자체를 반영하는 것이었다. 그런데 모인 친구들 또한 하나하나가 만만치 않은 존재들이었다. 입학만 해도 대단하다고 여기는 전국 명문 고등학교에서 수석을 차지했다는 자들 또한 수두룩하게 모여 있었다. 그밖에도 내색을 안 해 그렇지 각자 나름대로 신화 하나씩은 품고 있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그러니까 나는 여기서 어? 공고 출신도 하나있어? 하는 정도의 시선밖에 끌 것이 없었다. 실제 수업이 진행되면서 나는 지금까지 느껴보지 못한 새로운 경험을 하게 되었다. 내가 미처 생각하지 못했거나, 할 수 있다고 생각하지 않았던 것을 척척해내는 모습이 보였던 것이다. 아, 나를 앞서는 친구들이 있구나… 생각해보면 극히 당연한 일이었다. 내가 왜 남보다 늘 앞서야 하는가? 그런데도 이것은 내게 새로운 경험이었고, 그런 만큼 새로운자극을 주었다.
배움의 되새김질
졸업과 함께 내게 불어 닥친 현실적 문제는 병역을 어떻게 치를까 하는 것이었다. 나는 이미 예비 신체검사에서 갑종합격을 받아놓은 터였다. 가만히 있으면 육군사병으로 가서 3년간 복무하게 되어 있었다. 혹 운이 좋아 외국 유학 수속을 끝내면 2년 만에도 제대하고 나오는 수가 있으나 그러한 것을 기대하기는 매우 어려운 실정이었다. 가장 무난한 길이 공군장교가 되어 서울에 있던 공군사관학교에서 물리학 교관으로 3년간 물리학을 가르치다가 제대하는 것이었다. 그런데 막상 공군장교 지원서를 제출할 무렵 직접 공군사관학교를 방문해 상황을 알아본 결과 가능성이 전혀 없다는 것을 알았다. 물리교관실에는 이미 인원이 넘쳐나서 그전 해에 오기로 되었던 사람들조차 받지 못해 임시로 수학교관실로 보내 수학을 가르치게 하고 있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나도 다른 마땅한 선택이 없었기에 일단 공군에 들어가서 기상예보를 담당하는 기상장교나 기계정비를 담당하는 정비장교로 몇 년간 근무할생각으로 공군장교 시험에 응시했다. 이때 모집한 분야는 예능계까지 포함하여 매우 다양했다. 이른바 각종장교라 불렀는데, 함께 입대했던 100여 명은 이후 학계를 포함해 한국사회 여러 분야에서 매우 중요한 역할을 담당했다.
어쨌든 나는 공사교관으로 왔고, 처음 몇 달 동안 수학교관실에 머물다가 마침 물리교관실에 한 자리가 비어 곧 그리 옮겨가 4년 동안 물리학을 가르치며 내 군 복무를 마치게 되었다. 이 4년간의 교육경험은 내 생애에서 매우 소중한 자산이 되었다. 군인생활에서 오는 불가피한 제약이야 당연히 있었지만 공군사관학교 생도들에게 물리학 가르치는 것이 주 업무였던 만큼 시간을 내어 공부할 여건이 어느 정도 주어졌고, 이는 결국 내 학문적 토대를 다지는 좋은 기회가 되었다. 나는 처음 강의를 시작하기에 앞서 가만히 눈을 감고 내가 정말 물리학에 대해 알고 있는 것이 무엇인가 한번 깊이 되살펴봤다. 그랬더니 놀랍게도 아는 것이 아무것도 없다는 결론이 나왔다. 이대로라면 그저 교과서에 적혀있는 것을 내가 몇 시간 먼저 읽고 그 내용을 뇌까릴 참이었다. 이것은 아니다. 적어도 내 입으로 강의할 때에는 교과서와 무관하게 내가 알고 있는 것을 내뱉어야 한다 는 생각을 했고, 곧 물리학 그 자체에 대한 내 나름의 정리작업에 들어갔다. 이것은 그때까지 내가 주로 받아왔던 교과서에 의존한 평면적 교육에 대한 반발이기도 했다. 만족스럽지 않은 교육을 받은 사람은 자기가 교육자 자리에 설때 그와 반대되는 교육방식을 택하게 된다. 이러한 방법의 전환은 교육을 위해서 뿐 아니라 내 학습을 위해서도 매우 중요한 과정이었다.
이렇게 하여 나는 단지 공군사관학교에서 가르치던 초보적인 물리학 뿐 아니라 고전역학, 전기자기학 등 대학과정의 주요 과목을 내 나름대로 재정리해 나갔고, 이 과정에서 과연 물리학의 정수가 무엇인가에 대해 새로 음미할 수 있었다. 이것은 말하자면 소의 되새김질 같은 것이었다. 대학 4년간의 학습이 소화불량에 걸려 있어서 그대로 두었더라면 물리학 혐오증이라는 증상에 걸릴 뻔했는데, 다행이 이 되새김질을 통해 다시 내 것으로 확실하게 바꾸어놓을 수 있었다. 이때 나는 공군사관학교 물리학교관실의 안 아무개 소령의 도움을 많이 받았는데, 이분은 공사 출신으로 일찍이 미국에 가서 물리학석사과정 위탁교육을 받고 돌아온 분이었다. 고맙게도 자기가 미국에서 구입한 당시 이름만 듣고 실물을 보기 어려웠던 많은 물리학 전문서적들을 물리교관실 서가에 비치하여 누구나 자유롭게 볼 수 있도록 해주었고, 덕분에 나는 고전역학, 전기자기학 등 물리학의 주요 과목에서 그 분야 최고 수준의 교재들을 활용할 수 있었다. 이 과목들은 그 내용으로 보아 대략 미국의 주요 대학 대학원 과정에서 가르치는 수준이었고, 나는 대학원 과정의 주요 부분을 자력으로 학습해나간 것이다.
나는 공군사관학교에서 물리학에 대한 기초학습을 하는 한편 서서히 해외유학을 준비하였다. 이것은 이후 집에서 유학을 위한 학비를 도움 받을 가능성이 있어서가 아니라 오히려 그 반대에 더 가까웠다. 대학을 졸업할 즈음 아버지의 건강문제로 온 가족이 심정적으로나 재정적으로 엄청난 시련을 겪게 되었다. 여기에 길이 하나 트였다. 외국 대학에 나가 공부하면서 조교로 받게 되는 급료 일부를 절약해서 송금해드리는 일이다. 당시 국내에서 웬만한 직장에 취직하더라도 거기서 받는 봉급으로 생활하고 남는 것이 거의 없는 실정이었다. 그보다는 오히려 장학금의 일부이기는 하지만 외국의 조교 급료가 이보다 훨씬 많았고, 잘만 절약하면 집을 도울 수도 있었다. 문제는 어떻게 외국대학에서 이러한 자리를 얻어내느냐는 것이었다.
그런데 여기에도 도움을 받을 길이 한 가지 있었다. 미국 대학 졸업생들이 대학원 입학을 위해 흔히 치르는 GRE(Graduated Record Examination)라는 시험에서 성적을 잘 받아내는 것이었다. 하지만 이 시험에서 내게 가장 불리한 점은 영어로 시험을 치른다는 점이었다. 시간은 세 시간이었던 것 같은데, 시험문제만 거의 책 한 권이었다. 문제는 모두 5지선다형이고 지문도 대체로 매우 길어서 읽어야 할 내용이 무척 많았다. 문제들은 매우 훌륭했다. 아, 물리문제를 선다형으로 이렇게 잘 꾸밀 수도 있구나! 하는 감탄이 저절로 흘러나오는 문제가 여럿 있었다. 불확실한 문제는 유보해가며 초고속으로 처리하여 일단 끝까지 간 뒤 다시 돌아와 유보해 두었던 문제들을 마저 처리하고 나니 가까스로 끝나는 시간과 맞아떨어졌다. 얼마 후 결과가 통보되었다. 상대등급이 98퍼센트로 적혀 있었다. 실제 98퍼센트가 지정된 등급 가운데 최고 등급이었다. 이는 곧 내 성적이 최상위 2퍼센트 이내에 속한다는 것을 의미했다.
일곱째 마당 _ 물질에서 생명으로
외국 유학을 위해 여러 가지를 고려한 끝에 선정한 것이 미국 캘리포니아대학 리버사이드 캠퍼스였다. 처음에는 내가 한 1년 먼저 가서 여건을 마련하고, 다음 해쯤 아내가 합류하여 함께 공부할 계획을 했다. 그러나 계획을 바꾸어 처음부터 함께 지원하기로 했다. 아내는 나처럼 GRE시험을 친 것은 아니었지만 대학교 때 성적이 워낙 출중하여 역시 조교 자리를 얻을 가능성이 많았다. 그리하여 곧우리가 부부라는 사실을 밝히고 아내의 지원서도 추가로 같은 곳에 보냈다. 드디어 캘리포니아대학 리버사이드 캠퍼스에서 나와 내 아내 앞으로 각각 통보가 왔다. 교육조교(T.A.)로 얼마를 줄 테니 와달라는 것이었다. 그 급료를 당시 우리 돈으로 환산하면 엄청난 금액이었다.
대학에 도착하여 물리학과를 찾아가니 건물 안내판에 이미 우리 부부의 이름과 우리가 함께 사용할 사무실 번호까지 게시되어 있었다. 학교에서는 독립된 사무실 하나를 우리 두 사람이 전용으로 사용하도록 배려해 놓고 있었다. 우리가 거주할 집 또한 학교의 결혼한 대학원생을 위해 마련한 것으로, 학교 주변 숲 속에 널찍널찍 자리 잡은 듀플렉스(Duplex: 두 단독주택을 서로 등지고 지은 집)였다. 학교 주변과 리버사이드라는 도시 자체도 놀랍도록 정갈했고, 종려나무 등 열대수종들이 가로수로 도열하고 있는 것이 더욱 이국적인 풍치를 자아냈다. 처음 우리에게 부과된 과제는 대학 1학년 물리실험실에서 실험지도를 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막상 실험실에 들어가 학생들과 접하다 보니 그들과 언어소통하기가 무척 어려웠다. 결국 학교 측과 협의하여 학생들의 숙제와 시험답안을 채점하는 일로 바꾸었다. 우리는 혹시 우리 일로 앞으로 한국 출신 학생들이 이곳에 올 때 불이익이 돌아가지 않을까염려되어 맡은 일만이라도 실망을 주지 않도록 무척 공을 들여 수행했다.
캘리포니아대학 리버사이드 캠퍼스 물리학과는 만들어진 지 얼마 되지 않던 곳으로, 진취적 학풍을 많이 지니고 있었다. 그 대표적인 사례 가운데 하나가 석사과정을 거치지 않고 바로 박사과정에 진입한다는 것이었다. 그것만이 아니었다. 박사학위를 하는 데 꼭 들어야 할 필수과목이나 심지어 박사학위를 위해 필수적으로 최소 몇 학점 이상 취득해야 한다는 규정조차 없었다. 그저 자기가 공부하기 위해 필요한 만큼만 이수하면 되었다. 다만, 박사학위를 취득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통과해야 할 무서운 관문이 하나 있었다. 그것은 학교마다 명칭이 조금씩 다른데, 이곳에서는 종합시험(Comprehensive Exam)이라고 했다. 이 시험은 규정상 두 번까지만 칠 수 있다. 즉 두 번 쳐서도 합격이 안 되면 적어도 여기서는 박사학위 취득이 불가능하게 된다. 그래서 준비가 별로 안 되었으면 함부로 응시하지 못한다. 그곳 학생들의 관례를 보니 빨리 준비된 학생들은 입학 후 1년 반이 지나면 종합시험에 응시하는 것 같았다. 그래서 나 또한 이 시기에 응시했는데, 역시 전혀 강의를 듣지 않은 핵심과목이 많아서 다소 걱정되었다. 기본적인 것이야 혼자 이해했다고 하더라도 이를 바탕으로 구체적인 문제를 풀어내는 것은 또 다른 차원의 일이 아닌가? 어쨌든 이삼 일에 걸친 고된 시험을 무사히 치러냈고, 합격했다.
여덟째 마당 _ 학문과 등산
나와 내 아내는 1970년 8월 말 귀국했다. 미국으로 떠난 지 꼭 5년 만이었다. 나는 당시 서울대학교 공과대학 응용물리학과에 내정되어 돌아왔고, 이듬해 2월 정식 조교수로 발령을 받았다. 그 후 응용물리학과는 1975년 서울대학교 종합화 계획에 따라 문리과대학 물리학과와 합쳐 자연과학대학 물리학과로 개편되었고, 나는 2003년까지 자연과학대학 물리학과 교수로 재직했다. 이로써 도합 33년 가까운 기간을 서울대학교에서 보낸 셈이다. 아내 또한 1970년에 돌아오면서부터 2004년 정년으로 물러날 때까지 34년간 이화여자대학교에서 물리학 교수로 일했다.
내 경우로 보면 공부하는 장소는 세 군데이다. 그 하나는 물론 책상머리에 앉는 일이다. 이것을 빼놓고는 공부할 수 없다. 그 다음은 산책길이다. 한가한 들길도 좋고 가벼운 등산길도 좋다. 무엇인가 깊게 생각할 일이 생기면 나는 중요한 요지만 머릿속에 넣고 산책길로 나선다. 그리고 주위 경관에 이끌려 그 문제를 잊기도 하고 때때로 생각하기도 한다. 그렇게 한참을 헤매다가 보면 불현듯 좋은 아이디어가 떠오르는 경험을 여러 번 했다. 책상에만 앉아 있을 때는 머리가 제자리걸음을 하기 쉽다. 그럴 때에 머리에 휴식을 주면서 생각이 자연스럽게 떠돌게 내버려두면 제가 스스로 해결의 실마리를 찾아 연결해 놓는다. 산책길에서 이런 묘미를 아직 느끼지 못한 사람이라면 부지런히 이 방면으로 내공을 쌓을 일이다. 세 번째 공부 장소는 모두 부러워할 바로 잠자리이다. 마치 마취제를 맞고 잠을 자고 나면 수술이 끝나 있듯이 나는 공부하다가 피곤해지면 역시 내가 생각하던 문제를 머릿속에 넣고 잠자리에 든다. 그러면 피곤하던 차여서 쉽게 잠이 온다. 그런데 놀라운 일은 새벽에 잠에서 깨어나면 어느새 고민하던 문제가 내 머릿속에서 빙빙 돌고 있다가 많은 경우 깨끗하게 풀려나온다. 만일 이 경험이 없다면 그 사람 또한 아직 공부꾼 대열에 끼기가 어렵다.
그러니까 공부는 책상에 앉아 힘들여 하기도 하지만 산에 올라가 놀면서도 하고, 잠자리에 들어가 쉬면서도 하는 것이다. 문제는 이 모두가 공부의 과정이 되도록 사고 습관을 조정하는 일이다. 그렇게 되면 나는 하루에 몇 시간 공부하는가? 책상 앞에는 한두 시간 혹은 서너 시간 앉아 있지만 사실은 24시간 공부하는 것이다. 그것도 전혀 힘들지 않게, 지루하지 않게.
학문은 말하자면 일생을 두고 오르는 등산길이다. 빨리 올라가 멋진 조망을 보고 남이 오르지 못한새 봉우리에 첫발을 디뎠다는 영예를 누리고 싶은 마음이 어찌 없겠는가? 그러나 이것을 목적으로 해서는 안 된다. 길게 보면 이것은 곧 자신의 잠재력을 소진시켜 더는 진전을 어렵게 하고, 성급한 나머지 발을 잘못 디뎌 다칠 위험을 가중시킨다. 오직 자기 몸과 학문의 세계를 하나로 조화시켜 그 안에서 지속적인 즐거움을 찾아나가는 길만이 장기적인 성취를 가능케 하며, 설혹 특별한 성취가 없더라도 그 삶 자체로 값지다.
아홉째 마당 _ 가르침과 깨달음
가르치는 자리에 있는 사람이 누릴 수 있는 가장 큰 보상은 자기 자신이 깨달음에 다가갈 좋은 여건에 놓인다는 점이다. 우리는 흔히 책을 읽거나 강의를 들으면 그 무엇을 알게 된다고 생각하지만 많은 경우 그것은 착각이다. 그 착각은 스승(또는 책)의 말과 스승(또는 책)에 대한 신뢰에서 온다. 그 말을 알아듣고 그 말을 기억하면 그것으로 안다고 생각하며, 스승(또는 책)에 대한 신뢰를 통해 스스로 검증해 보지 않고도 그 말이 옳을 것이라고 믿어버린다. 그러니 이것은 달을 보지 않고 달을 가리키는 스승의 손가락만 보는 경우에 해당한다. 그리고 그 손가락의 방향만 기억하면서 마치 달을 본 것으로 착각하는 것이다. 그러다가 자기가 막상 가르치는 자리에 서게 될 때, 즉 자기가 직접 손가락질을 해야 할 때 비로소 정말 허둥지둥 달을 살피게 된다. 그러니까 많은 경우 가르치는 자리에 서보지 않으면 진정한 앎에 이르기 어렵다는 이야기다.
만일 교사가 가르친다는 사명을 의식해서라도 스스로 먼저 깨우침에 이를 수 있다면 그가 설혹 학생들마저 깨우치게 하는 데에는 성공하지 못한다 하더라도 자기 자신을 위해서는 큰 보상을 받게 되는 셈이다. 교사가 여기까지 만이라도 도달한다면 그는 적어도 반은 성공한 것이다. 이것이 바로 내가 지난 30여 년 동안 가르치는 자리에 있으면서 애써온 일이다. 나는 우선 나 자신이 알고 가르치자는데 중점을 두었다. 나 자신은 설혹 스승의 손만 보고 배웠다 하더라도 지금은 달을 직접 보고 손가락질하자는 것이다. 그리고 내가 시도하는 것은 물론 학생들에게 내 손을 보지 말고 달을 보게 하자는 것이다. 그러나 바로 이 두 번째 부분이 더욱 어려운 일이었으며, 이 점에서는 오직 절반의 성공만 거두었다고 말할 수 있다.
열째 마당 _ 온생명과 낱생명
어느 물리학자에게서 들은 이야기다. 초등학교에 다니는 딸이 물리학이 뭐냐고 자꾸 묻는데, 마땅히 대답해줄 말이 없어 조금 더 자라면 알려 주겠다고 슬슬 미루고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학교에서 돌아온 딸아이가 싱글벙글하며 뛰어 들어왔다. 아빠, 나 물리학이 뭔지 알았어요. 그래? 그게 뭔데? 산 것을 공부하는 게 생물학이고, 죽은 것을 공부하는 게 물리학이에요.
아주 명쾌해서 좋다. 물리학이 시체를 다루는 학문으로 오해하지만 않는다면 이것이 대개 초등학교 아이들뿐 아니라 일반사람들이 물리학과 생물학에 대해 생각하는 것이다. 사실 물리학자들은 대부분 구체적 연구대상으로 살아 있지 않은 것을 다룬다. 그러나 그게 본질은 아니다. 물리학의 기본법칙은 살아 있는 것이든 아니든 물질로 구성된 것에는 어디에나 적용된다. 그러므로 물리학의 기본법칙을 먼저 충분히 파악하고 이를 통해 살아 있는 것을 연구하는 사람도 있는데, 이런 사람들을 흔히 생(물)물리학자라고 한다. 그리고 요즈음은 생물학자들도 점점 물리학에 관심을 두고 이를 통해서 자신들이 다루는 대상을 이해하려는 경향을 보이고 있다. 그러니까 사실은 생물학과 물리학의 경계는 점점 옅어져 가는 셈이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생명을 있는 그대로 바라볼 수 있는가? 이는 매우 간단하다. 생명에 대한 기존의 관점을 조금만 바꾸면 된다. 이렇게 하면 새 개념체계를 얻을 때 생명의 모든 것을 되살려내는 동시에 기왕에는 보지 못했던 생명의 참모습을 볼 수 있게 된다. 이게 바로 낱생명과 보생명 그리고 온생명이라는 새로운 개념 틀을 통해 생명을 파악하는 방식이다. 즉 우리가 지금까지 생명이라고 생각했던 것은 진정한 의미의 생명이 아니라 이것의 한 부분인 낱생명이었다. 이것이 생명으로 기능하기 위해서는 이것의 밖에 있으며 이것 못지않게 본질적인 존재인 보생명과 함께해야 한다. 이렇게 함께해서 진정한 의미의 생명 구실을 하는 그 전체가 바로 온생명이라는 이야기이다.
비유하면 이렇다. 우리가 진정한 의미의 나무를 파악하고자 하는데, 그동안은 여기에 달린 나뭇잎만 보고 나무라고 생각했다고 하자. 그리고 줄기라든가 뿌리를 포함한 나무의 둥치는 나무를 지탱해주는 여건이라고만 생각했다고 하자. 이렇게 되면 도대체 나무를 규정하기가 매우 어려워진다. 가을이 되어 낙엽이 지면 나무가 없어지는 게 되고 봄이 되어 잎이 돋아나면 나무가 생겨나는 게 된다. 나무의 생리를 이해하려면 나무 전체를 보아야 하는데 잎만 보고 있기에 여러 가지 무리가 따른다. 나무를 소중히 여기고 보살피려 해도 잎만 우선하기 때문에 줄기나 뿌리에 문제가 생기는 것은 오로지 부차적 관심사가 될 수밖에 없다. 이때 누가 나타나 나뭇잎 하나하나가 독자적 실체가 아니라 오히려 나무전체(온나무)에 붙은 부분일 뿐이라고 일러 줄 수 있다. 그래서 이것을 그냥 나무라 하기보다 나뭇잎(낱나무)이라 하는 것이 적절하며, 이것이 제 기능을 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나무 둥치(보나무)에 붙어있어야 한다고 설명해줄 수 있을 것이다.
내가 지난 몇 십 년 동안 매우 타당한 이런 이야기를 해도 알아듣는 사람이 별로 없었다. 사람들 눈에 살아 있는 생명체까지는 잘 보이지만 이것과 연결되는 보생명의 모습은 잘 보이지 않는 것이다. 그래서 이것은 생명이 아닌, 그러면서도 생명을 돕는 다른 무엇인 줄만 아는 것이다. 그러나 생명이 존재하는 양상을 그 아래 흐르는 자연의 법칙을 통해 인과의 사슬로 파악해보면 생명체와 보생명은 결코 분리될 수 없는 한 연속체이며, 결국 이들이 합하여 더는 외부여건에 의존하지 않는 완결된 실체, 곧 온생명을 이루게 되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러므로 온생명이야말로 더는 외부에서 본질적 지원을 받지 않고도 생명활동을 지탱할 수 있는 생명의 온전한 모습이다. 따라서 이를 일러 (그리고 이것만 일러) 생명이라 지칭함이 매우 타당하나 이미 생명이라는 용어가 너무도 다양하게 사용되므로 이런 온전한 의미의 생명이라는 뜻에서 온생명이라 따로 지칭할 필요가 있다. 그렇다면 실제 온생명은 어떤 모습을 하고 있는가? 그리고 그 모습은 우리가 어떻게 파악할 수 있는가? 이것을 말해줄 수 있는 것이 현재 우리가 지는 최선의 지식, 곧 현대과학의 안목이라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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