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처 VS 클린턴 리더십
채희봉 저
1부 대처와 클린턴에게 배우는 한국형 리더십
정책 리더십의 성공 모델
이 시기에 왜 대처와 클린턴의 리더십이 중요한 의미를 가질까? 결론부터 말하면 대처와 클린턴은 비전과 정책의 리더십으로 국민들의 지지를 획득하고 성과를 낸 ‘정책 리더십의 성공 모델’이기 때문이다. 대처는 원칙을 강조하는 리더십의 지도자로 잘 알려져 있다. 노조의 과격한 활동에 대해 법과 원칙으로 대응함으로써 영국의 노동 개혁을 이끌어낸 인물이다. 또한 자신이 강조하는 원칙만큼 정책에 대한 이해가 무척 깊은 리더였다. 민영화 정책, 노동 개혁 정책, 재정 정책, 부동산 정책, 교육 정책 등에 걸쳐 그 세세한 내용을 분석하고 입안했다. 클린턴 역시 마찬가지이다. 클린턴도 정책에 대한 이해가 매우 깊은 인물이었다. 대처와 클린턴이 높이 평가받는 것은 이들이 정책에 대해 이해가 깊었을 뿐 아니라 정책을 성공적으로 수립하고 집행했다는 것이다. 이들은 각각 영국과 미국이 요구하는 문제를 자신들의 정책을 통해 해결했다. 이러한 정책의 성공을 통해 대처는 세 번의 집권을, 클린턴은 재선 당선을 각각 이끌어냈던 것이다.
마거릿 대처는 1975년 히스를 물리치고 여성으로서는 영국 최초로 보수당 당수에 선출되었으며 1979년 노동당의 캘러핸 내각이 의회에서 불신임을 당한 후 치른 총선에서 보수당이 승리함으로써 영국 최초의 여성 총리가 되었다. 대처는 1979년과 1980년에 걸쳐 통화주의에 입각한 통화량 감축과 재정 긴축 정책을 펼침으로써 인플레이션을 해결하고 영국 경제 번영의 기초를 마련했다. 그 후 수천 마일 떨어진 아르헨티나 인근의 포클랜드 섬에서 벌어진 아르헨티나와의 전쟁에서 승리함으로써 영국의 국가 안보를 굳건하게 지키는 성과도 거두었다. 또한 과격한 노조에 대한 노동 개혁, 민영화 등을 통해 영국병이라고 불리는 영국 경제의 비효율을 개선했다. 대처의 시장 경제와 자본주의에 대한 확고한 신념, 재정 정책과 통화 정책의 긴축, 민영화 등의 정책은 그 내용이 뚜렷하고 일관되어서 대처리즘이라고 불릴 정도였다. 또한 주식과 주택 보급의 확대 정책, 교육에 대한 학생과 학부모의 선택권 강조, 행정 서비스 개선 등 정부 혁신을 통해 정부의 간섭을 축소하고 국민의 자유로운 선택과 소유권을 장려하는 소위 ‘권력을 국민에게 돌려주는’ 정책을 일관되게 추진했다.
클린턴은 제2차 세계대전 이후에 태어난 베이비 부머 세대로서는 최초로 미국 대통령에 당선된 사람이다. 한 번의 주지사를 역임한 후 재선에 실패했는데, 그 후 재도전하여 주지사에 취임하는 등 주지사 시절부터 정치적 역경을 극복하는 데 탁월한 수완을 보였다. 그 후 중앙 정치 무대로 진출하여 젊은 패기와 미래지향적 비전을 내세워 민주당의 대통령 후보로 선출되었다. 당시 걸프전 승리로 지지율이 90퍼센트에 달했던 공화당의 부시 대통령을 물리치고 1992년 집권에 성공함으로써 미국 정치사상 대 파란을 일으켰다. 초기에 미숙한 국정운영으로 많은 실패를 경험했고, 심지어 1994년 총선에서 깅리치가 주도한 공화당에 상원과 하원의 과반수를 모두 내주는 시련에 직면했다. 하지만 사회복지 지출을 둘러싼 예산안 처리 과정에서 공화당의 극단적인 조치에 대한 국민들의 실망감을 등에 업고 클린턴은 정치적 반전에 성공했다. 이 후 클린턴은 초당파적인 입장에서 국민의 대통령으로 다가서는 전략을 통해 재집권했다. 또한 신경제라고 불리는 IT 등 산업기술의 비약적인 발전과 급성장으로 경제 성장을 이룩했고, 수천억 달러에 달했던 고질적인 재정적자 문제를 해결하여 수십 년 만에 재정흑자로 돌아설 수 있도록 했다. 클린턴은 미국의 장기불황이라는 긴 터널을 탈출하면서 오늘날의 미국을 만들어내는 데 크게 기여했다.
대통령 리더십, 왜 벤치마킹해야 하나
물론 단순히 대처와 클린턴으로부터 한국형 리더십의 교훈을 얻어내는 데는 한계가 있다. 영국과 미국의 정치 환경은 우리나라의 경우와 매우 다르기 때문이다. 그러나 영국과 미국에서는 우리나라에 비해 훨씬 오래전부터 비전과 정책의 리더십 대결이 있었다. 이러한 정책 리더십의 치열한 공방 속에서 대처와 클린턴은 승리하였을 뿐 아니라 상대적으로 장기집권을 구가하는 성과도 누렸다. 게다가 영국과 미국은 우리나라보다 발전 단계가 앞서 있으며, 우리가 지금 경험하고 있는 문제나 앞으로 다가올 문제를 미리 겪어 본 경험이 있다. 대처와 클린턴이 1980년대와 1990년대를 풍미한 지도자이지만, 그들의 정책은 지금도 벤치마킹할 내용이 많다. 우리나라의 리더들이 대처와 클린턴의 정책 리더십을 제대로 이해한다면 국민의 가슴에 와닿는 정책들을 제시하여 그들의 마음을 사로잡고 단순히 이미지가 아닌 준비된 정책으로 국민의 지지를 획득할 수 있을 것이다. 아울러 집권 후에도 준비된 정책을 통해 안정적이고 효율적인 국정운영을 할 수 있을 것이다. 또한 일반 국민과 유권자들도 우리나라가 반드시 해결해야 할 문제에는 어떤 것들이 있고, 또 어떤 방식으로 해결되어야 하는지에 대해 상세히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될 것이다. 이러한 이해를 바탕으로 대통령을 선출한다면 정책을 통한 문제 해결 능력이 있는 리더를 선출하는 것이 가능해질 것이다. 우리나라에서 진보와 보수 그리고 중도의 대결은 이제 본격화될 가능성이 높다. 하지만 이러한 이념의 대결은 구체적인 정책 대결로 발전되어야만 의미가 있다. 구체적인 정책의 뒷받침이 없는 추상적인 이념 논쟁은 국가적으로 불행한 일이다. 이러한 논쟁은 한국 정치를 진전시키지 못하고, 미래의 한국에 번영을 가져다주지 못할 것이다.
대처와 클린턴에게 배우는 성공하는 리더의 자질
성공한 리더인 대처와 클린턴에게서 배울 수 있는 리더십의 성공 요인, 즉 리더의 자질은 무엇일까?
두 사람은 다른 자질을 가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각각 훌륭한 리더십을 발휘했다. 따라서 대처와 클린턴의 성공을 가능하게 한 자질은 무엇이며, 이러한 자질이 구체적으로 어떻게 리더십의 성공으로 이어졌는지를 알아보는 것도 의미가 크다고 할 것이다.
대처 리더십의 성공 요인
대처 리더십이 성공할 수 있었던 훌륭한 자질로는 단순하고 명료한 비전 제시, 일관성 있는 신념, 명확한 메시지 전달, 결단력 등을 들 수 있다.
첫째로, 대처는 영국 국민에게 명료한 비전을 제시했다. 1970년대 후반 영국 경제는 암울했다. 높은 실업률, 전투적인 노조, 낮은 생산성 등 이른바 영국병으로 영국 경제는 신음하고 있었다. 노조들의 잦은 파업으로 공공 서비스는 빈번히 마비되었고, 영국 국민은 불만의 겨울을 보내고 있었다. 이러한 암울한 시대에 대처는 영국병을 치유하기 위해서는 영국을 확고한 시장경제 국가로 바꿀 것이며, 국가의 역할보다는 개인, 기업의 역할을 중요시하고, 영국에 만연된 노동당의 사회주의적 요소를 철폐해 나간다는 명쾌한 비전을 제시했다. 단순하고 명료한 대처의 비전은 영국의 국민과 시장에 확실한 신호를 보냈다. 따라서 영국 국민과 기업들은 앞으로 영국이 어떤 방향으로 나아갈 것인가에 대해서 쉽게 이해할 수 있었고, 시장의 예측 가능성도 높아졌다.
둘째로, 대처는 일관성 있는 신념을 가지고 있었다. 대처는 자신이 스스로 옳다고 생각하는 신념을 포기하지 않았다. 그 대표적인 것이 아서 스카길이 이끄는 광산노조 파업의 처리 문제였다. 대처 정부의 몇몇 인사들은 광산노조 파업에 대한 대응 과정에서 노조의 요구를 수용할 필요가 있다는 입장을 비추기도 했다. 하지만 대처는 자신의 신념에 대한 일관성을 잃지 않았다. 대처는 광산노조의 파업기간 동안 일관되게 강경한 입장을 고수했고, 결국은 광산노조와의 대결에서 승리했다. 그 승리를 계기로 영국에서 과격한 노조의 파업은 막을 내렸다.
셋째로, 대처는 자신이 영국을 어떠한 방향으로 리드할 것인가에 대해 국민에게 확실한 메시지를 전달했다. 리더는 주요 사안에 대하여 국민에게 명확한 메시지를 전달할 필요가 있는데, 대처는 이러한 측면에서 성공했다. 그 대표적인 것이 1980년의 보수당 회의에서 이야기한 “저는 방향을 바꾸지 않을 것입니다.(The lady is not for turning).”라는 유명한 메시지이다. 이 발언은 자신의 일관성 있는 신념을 보수당 내의 인사들, 야당, 언론, 일반 국민에게 효과적으로 전달하는 역할을 했다.
넷째로, 대처의 훌륭한 자질 중의 하나는 결단력이다. 대처가 추진한 정책은 사실 인기가 없는 정책이었다. 특히 재정지출을 억제하는 정책은 결단을 필요로 했다. 국가의 리더는 일반적으로 자신의 비전과 이상을 실현할 수 있는 정부 프로그램을 선호하게 마련이다. 국민 또한 자신이 재정지출 프로그램의 수혜자인 경우 그 재정지출의 삭감을 반대할 것이다. 하지만 대처는 이러한 유혹에 굴하지 않고 결단력 있게 재정지출 억제 방안을 실행에 옮겼다.
클린턴 리더십의 성공요인
클린턴의 경우 실패로부터의 회복, 문제의 본질을 파악하는 지적인 능력, 고도의 정치적 감각, 과감하게 방향 전환을 할 수 있는 용기, 국민들에 대한 관심과 애정 등이 훌륭한 자질로 평가되고 있다.
첫째로, 클린턴은 실패로부터의 학습을 통해 올바른 결정을 내리는데 탁월한 능력을 보였다. 클린턴은 어느 대통령보다 실패를 많이 경험한 대통령이다. 클린턴의 대통령직 인수는 실패의 전형적 사례로 평가되었고, 건강보험 개혁의 실패, 화이트워터 스캔들, 1994년 의회선거의 참패, 탄핵 등 굵직한 실패를 경험했다. 하지만 클린턴은 자신의 정치와 대통령직 수행에 대한 열정을 잃지 않았다. 그는 이러한 실패의 충격으로부터 벗어나 자신의 정치적 역량을 회복하는 데 탁월한 능력을 가지고 있었다.
둘째로, 문제의 본질을 이해하는 지적인 클린턴의 능력을 들 수 있다. 클린턴은 공공정책의 복잡성과 본질을 제대로 이해한 대통령 중의 하나로 평가된다. 대통령들은 대개 어떤 이슈의 정치적 측면인 ‘이슈의 정치학’에 대해서는 많은 식견을 가지고 있지만, 이슈 자체에 대해서는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그러나 클린턴은 이슈의 정치학뿐 아니라 이슈 자체에 대한 이해도 깊었고, 그 이슈를 철저하게 파악하고자 노력했다. 클린턴은 최고의 경제팀을 가지고 있었지만 보좌관, 참모, 자문교수들의 생각에 대해 자신이 철저히 이해하지 못할 경우 만족하지 않았다. 클린턴은 복잡한 통계와 전문용어를 직접 분석하고 파악했다. 클린턴은 또한 이슈에 대한 다양한 관점을 청취하는 것에 능했다. 다른 사람들의 견해 중 가장 좋은 점을 골라 통합된 하나의 정책으로 만들어가는 데 능력이 탁월했다.
셋째로, 클린턴의 남다른 자질 중의 하나는 바로 정치적 감각이었다. 클린턴은 유권자들을 포함해서 다양한 사람들의 의중을 파악하는데 능했다. 또한 자신의 생각을 설명하고 이슈를 제시하면서 청중들에게 연설하는 능력이 뛰어났는데, 그런 면에서 클린턴은 비슷한 세대 중에서 가장 유능한 정치인으로 평가된다. 클린턴은 형식에 구애받지 않고 청중들과의 교감을 중요하게 생각했다. 청중들을 제대로 이해하고 설득하는 능력은 그의 선거운동 과정에서 큰 힘이 되었다. 넷째로, 클린턴의 뛰어난 리더십 자질 중의 하나는 과감하게 방향 전환을 할 수 있는 용기이다. 대표적인 예가 바로 중산층에 대한 조세감면 공약을 과감하게 포기하고 대신 부유층에 대한 세율을 인상한 것이다. 사실 클린턴의 입장에서 중산층에 대한 조세감면을 포기하는 것은 정치적으로는 치명적인 결단이었다. 하지만 악화되는 재정적자를 감축하는 것이 국가를 위한 최선의 선택이라고 생각한 클린턴은 자신의 공약을 과감하게 포기하고 재정적자 감축을 위한 길을 걸었다.
다섯째로, 클린턴의 자질 중 돋보이는 것은 국민에 대한 관심과 애정이라고 할 수 있다. 클린턴은 특정 집단의 복지에 대해 각별한 관심을 보였다. 흑인, 여성, 빈곤층, 노약자, 장애인, 직업여성, 재해 희생자들은 클린턴이 각별한 관심과 애정을 쏟은 그룹이었다. 클린턴은 정책을 추진하면서 이러한 그룹들을 위한 정책을 보존하고 유지하려고 노력했다.
대처와 클린턴의 리더십의 실패 사례
물론 대처와 클린턴의 리더십이 모두 성공한 것은 아니다. 두 사람의 리더십에는 분명히 실패한 부분이 있고 이러한 리더십의 실패에서 얻어지는 교훈도 많다. 대처의 경우, 첫째로, 자신의 정당성을 지나치게 확신하였고, 그 신념에 부합하지 않는 정치세력과 인물들을 용납하지 않았다. 그 결과 대처 집권 당시 영국은 크게 분열되었다. 대표적인 예는 바로 보수주의의 우월성에 대한 확신이다. 대처는 보수주의가 영국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유일한 방법이라고 믿었다. 반면 노동당과 사회주의는 영국의 모든 문제의 근원이라고 생각했다. 노동당과 사회주의에 대한 반감은 거의 경멸에 가까웠다. 둘째로, 국민을 돌보는 지도자로서의 덕망을 갖추지 못했다. 훌륭한 업적에도 불구하고 임기 중 대처에 대한 일반 국민의 호감은 높지 않았다. 그 이유는 많은 국민이 대처가 영국 국민을 제대로 돌보지 않는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대표적인 것이 실업 문제이다. 대처가 집권한 기간 중 1982년부터 1987년까지 실업률은 10퍼센트를 웃돌았다. 대처는 영국 경제가 본격적으로 회복되면서 실업 문제는 해결될 것이라고 생각했지만, 현실은 그렇지 못했다. 대처는 높은 수준의 실업에 직면해 있으면서도 강력한 자유주의 정책을 구사했고, 경쟁에서 뒤처진 국민들에 대해서는 주목할 만한 대책을 내놓지 못했다. 그 결과 집권기간 동안 소득의 불균형과 지역간 불균형이 더욱 심해졌다. 이것이 대처 리더십의 한계이다. 대처 리더십의 세 번째 문제로는 전제적인 정부 운영을 들 수 있다. 대처는 정부 운영에 이견을 용납하지 않았다. 주요 정책을 결정하는 방식은 매우 중앙집권적이었고 권위주의적이었다. 대처 정부 내에서 다양한 의견을 개진하는 것은 불가능했다. 특히 심각한 것은 이러한 전제적인 스타일로 인해 자신과 오랫동안 함께해 온 사람들마저 결국은 등을 돌리게 되었다는 점이다.
클린턴의 리더십 중 실패한 사례는, 첫째로, 윤리적 취약성을 들 수 있다. 클린턴 대통령은 2000년 실시된 56명의 역사가와 정치전문가들에 대한 설문조사 결과 경제 관리로서는 역대 대통령 중 다섯 번째로 우수한 대통령으로 뽑혔지만, 도덕적 권위에서는 닉슨 대통령에도 못 미치는 꼴찌를 기록했다. 그는 재임기간 중 크고 작은 스캔들, 실수 등이 끊이지 않았다. 폴라 존스와의 스캔들, 모니카 르윈스키 스캔들, 탄핵 등이 그 대표적인 예이다. 둘째로, 외부의 비난에 대해 자신의 책임을 부인한 것을 들 수 있다. 그가 외부의 비난에 대응하는 방법 중 가장 전형적인 것은 자신에 대한 비난 일체를 부인하는 것이었다. 클린턴 대통령과 그의 참모들은 언론과 의회 등에 솔직하고 직접적인 대답을 하기보다는 부인으로 일관했다는 것이 지배적인 견해이다. 셋째로, 클린턴 대통령이 국민들을 상대로 한 직접 화법에는 능숙했지만, 정치시스템 내의 의회, 언론에 대한 설득은 제대로 하지 못했다는 점을 들 수 있다. 대통령으로서 성공하기 위해서는 단순히 선거에서 승리하고 토론에 능한 것만으로는 안 되며, 정치시스템 내에서 강력한 의회, 언론, 이익집단, 엘리트 집단을 설득할 수 있는 능력을 갖고 있어야 한다. 하지만 이러한 측면에서 클린턴의 정치적 기술은 다소 떨어지는 것으로 평가된다.
2부 영국 경제를 회생시킨 대처의 리더십
1장 뚜렷한 비전을 제시하라
국민은 때로 새로운 리더십의 필요성을 절실하게 느낀다. 특히 현 정권이 국가의 문제를 해결하는 데 실패한다면, 그리고 더 이상 희망을 가질 수 없다면 국민은 새로운 리더십을 갈망하게 된다. 1979년 5월 총선에서 대처는 노동당으로는 더 이상 영국의 문제를 해결할 수 없으며, 보수당만이 영국의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 특히 지나치게 비대해진 노조의 권력 문제를 해결하겠다고 말했다. 그리고 그동안 노동당이 전통적으로 주장해 온 국유화를 통한 국영기업과 계획경제 대신에 민영화를 통한 자유기업과 경쟁적인 시장경제를 주창했다. 또한 영국은 이제 새로운 리더십이 필요하며, 자신이 그 새로운 리더십의 주인공이라고 역설했다. 이러한 전략은 성공했고, 결국 보수당이 오랜 노동당의 지배를 종식시키고 새로이 역사의 무대 위로 올라서게 되었다.
대처가 총리로 자리 잡게 된 요인은 크게 영국 경제가 위기에 처한 시대 상황, 노동당 정부의 위기 대응 실패, 대처의 리더십과 비전 등으로 요약될 수 있다. 우선 노동당의 장기 집권으로 영국 경제가 번영하지 못했다는 시대적 상황을 들 수 있다. 노동당은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정권을 장악했는데, 당시 노동당의 주요 정책은 크게 1) 계획경제, 2) 국유화, 3) 노조와의 연대, 4) 복지국가 등 네 가지로 설명할 수 있다. 이러한 노동당의 정책이 1950년대에는 유효했으나, 1960대에는 오히려 영국 경제를 추락시키는 요인으로 작용했다. 그 이유는 경제 성장의 정체였다. 노동당은 완전고용을 추구하면서 국가가 국민에게 다양한 사회보장서비스를 제공할 것을 약속했다. 이러한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서는 경제의 지속적인 성장이 전제되어야 했다. 경제성장이 있어야 고용도 창출할 수 있고, 사회보장서비스에 필요한 재정수입을 확보할 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1960년대 초부터 영국 경제는 노동당 정부의 생각대로 움직이지 않았다. 경제는 빠른 속도로 성장하지 않았고, 그 결과 정부는 막대한 공공 부문의 임금 지급, 노령자 연금 지급, 병약자 건강보호, 젊은이들 교육기회 제공, 무주택자 주택 공급 등 공약 사항을 이행하는 데에 어려움을 겪게 되었다.
1971년 《더 타임즈》에 따르면, 영국은 ‘영국병’으로 신음하고 있었다. 대처가 집권하게 된 또 다른 원인 중의 하나로 노동당 정부가 국가 위기 대응에 실패한 영향을 들 수 있다. 1970년대는 영국병에 걸린 영국 경제 문제를 해결해야 할 시대였다. 하지만 1970년대 후반 노동당 정부는 이러한 영국병을 해결하는 데 실패했다. 영국 경제의 몰락은 대처가 집권하기 직전인 1978년과 1979년에 극에 달했다. 경제성장은 멈추었고, 세계 경기불황으로 인한 영국 경제의 불황은 파업에 의해 더욱 악화되었다. 실업자 수는 130만 명에 육박했고, 인플레이션이 문제의 근원이라는 인식이 확산되었다. 근로자들은 노동당 정부의 인금인상 가이드라인을 거부하였고, 인금인상 요구는 걷잡을 수 없이 번져갔다. 인플레이션에 분노한 약 100만 명 이상의 공공노동자들이 파업에 참가하면서 절정에 달했다. 병원은 환자 치료를 거부했고, 학교는 폐쇄되었다. 시대의 흐름이 노동당에 등을 돌리고 있었다.
노동당 정부가 영국의 문제를 해결하지 못하자, 정국은 엄청난 소용돌이에 휩싸였다. 1979년 4월에 의회가 해산되고, 5월에 총선이 실시되었다. 총선에서 노동당 정책은 유권자들의 불신을 산 반면, 대처와 보수당은 새로운 리더십의 필요성을 역설하며 신선한 출발을 했다. 대처는 강력한 대외정책과 국방비 지출의 증대, 투자 촉진을 위한 소득세율의 인하, 공공지출의 축소, 공공 부문 임금에 대한 엄격한 제한, 인플레이션 억제를 위한 정책들을 공약했다. 기업의 자유로운 활동, 시장경제의 확산과 경쟁의 촉진, 노조의 권력 제한을 공약으로 내세우는 한편, 노동당을 인플레이션 정당, 파업 정당으로 비난했다. 더불어 국가의 책임보다는 개인의 책임을 강조했다. 중산층 가치를 강조하면서 강력한 가족, 주택 소유의 확대, 개인 저축의 증진, 교육 기회의 확대, 엄격한 법과 질서의 구축 등을 주장했다. 노조의 특권을 제한하고, 공익 사업장에서는 파업을 제한하는 내용 등을 입법화할 것을 약속했다. 대처는 영국이 혼란한 시기에 노동당이 국가적 문제 해결에 실패하자, 전면에 나서서 강력한 리더십과 비전을 제시했고, 용기와 신념을 보임으로써 영국 국민의 마음을 움직였다. 이러한 개인적 자질과 용기, 신념은 대처를 약 11년 동안 영국의 위대한 총리로 만들었다.
국가의 문제를 해결하는 데 지속적인 개혁 어젠다를 제시하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 하지만 더욱 중요한 것은 개혁의 성과를 보이고 지지를 얻어내는 것이다. 개혁의 어젠다를 제시하는 것보다 성과를 거두는 것이 더 어렵다. 국가의 리더가 개혁의 성과를 내고 국민들로부터 긍정적인 평가를 받는다면 지지도는 상승한다. 대처는 1983년부터 1986년까지 집권 2기 동안 개혁의 어젠다를 제시하고 그 성과를 보이는 데 성공했다. 즉 국영기업 개혁, 노조 개혁, 지방정부 개혁의 어젠다를 제시하고 그 성과를 보였다.
첫 번째로 국영기업의 민영화를 가속화할 것을 공약했다. 대처는 경제 정책의 핵심으로 민영화를 선언하고 전화회사인 브리티시 텔레콤, 항공사인 브리티시 에어웨이즈, 철강회사인 브리티시 스틸, 자동차회사인 브리티시 레이랜드, 가스회사인 브리티시 가스의 해외지사 등의 민영화를 약속했다. 이러한 계획은 대담한 것이었고, 민영화의 폭과 범위는 당초 예상했던 수준을 훨씬 뛰어넘는 것이었다. 두 번째로 노조 개혁을 약속했다. 노조 지도부의 선출시 투표를 의무화하는 한편, 파업 전에 찬반투표를 반드시 거치도록 하였다. 또한 파업 전 찬반투표 의무를 위배할 경우에는 면책에서 제외되도록 하였다. 대처의 이러한 새로운 노동 개혁은 기존의 노동 개혁조치에 대한 폐지와 원상복구를 주장하는 노동당의 주장과 크게 대조되었다. 세 번째로 지방정부의 개혁을 주장했다. 대처와 보수당은 런던광역시와 대도시 지방정부 등의 폐지를 공약했다. 보수당은 이들 지방정부의 기능을 국민에게 더 가까이 다가갈 수 있는 런던자치구와 기타 지역의 자치구에 돌려주는 것을 목표로 하였다.
2장 일관성 있는 신념을 보여주고 국가 위기를 해결하라
경제 정책은 일관성이 매우 중요하다. 경제주체들은 정부의 경제정책이 어느 방향으로 움직일 것이냐에 대해 민감하다. 정책이 보내는 신호를 보고 자신의 경제 활동의 진로와 방향을 정한다. 만일 정부 정책이 일관성이 없을 경우에는 불확실성이 매우 커지고, 경제주체들이 투자를 지연하는 등 부작용이 발생한다. 따라서 정부 정책의 일관성을 통해 시장에 확실한 신호를 보내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
1980년 10월에 개최된 보수당 회의에서는 대처의 경제 정책을 지지하는 사람과 이를 반대하는 사람들 간에 일촉즉발의 긴장이 흐르고 있었다. 당시 대처의 반대자들은 인플레이션 억제를 위한 긴축적인 재정금융 정책이 국민들에게 인기가 없어 결국은 보수당 정권에 대한 지지를 떨어뜨릴 것이라고 주장했다. 대처가 집권 초기에 자신의 경제 정책을 의욕적으로 추진했음에도 불구하고 실업과 인플레이션 어느 하나도 제대로 해결될 기미가 보이지 않자, 대처 경제 정책에 대한 반대론자들은 높은 목소리로 대처 정책의 비효율성을 비판하기 시작했고, 이러한 반대론은 회의장 분위기를 압도했다. 심지어 대처의 경제 정책을 지지해 오던 인사들조차 대처 경제 정책의 효과에 대해 의문을 가질 정도였다.
하지만 이날 회의에서 대처는 확신에 찬 어조로 유명한 말을 남겼다. “숨죽인 상태로 언론에서 자주 언급하고 있는 ‘유턴’을 기다리고 있는 사람들에게 나는 오직 한 가지만 이야기하겠습니다. 당신이 원하면 당신은 유턴하십시오. 저는 돌아가지 않을 것입니다. 저는 이 이야기를 당신에게, 해외의 우리 친구들에게, 그리고 우리의 친구가 아닌 사람들에게 하고자 합니다.” 경제 정책의 일관성 있는 추진과 후퇴의 갈림길에서 대처는 자신의 신념을 고수했다. 이러한 신념으로 인해 보수당 내에서의 반대론은 제압되었다. 그리고 대처는 자신의 신념을 바탕으로 경제 정책을 일관성 있게 추진했다.
대처는 노조 파업에 대해 강경한 입장을 고수했다. 평소 노조의 불법 파업과 무소불위의 실력 행사가 영국 경제의 침체를 가져왔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노조를 약화시키지 않고서는 영국 경제의 개혁은 불가능하다고 믿었다. 이러한 신념은 노조의 필사적인 저항과 강경 대응에도 불구하고 흔들리지 않았다. 대처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당신은 어제의 상황을 TV에서 보았을 것입니다. 저는 법의 지배가 군중의 지배를 대신하도록 할 것이라는 점과 군중의 지배는 성공하지 못한다는 점을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원하지 않는 다른 사람들에게 자신들의 의지를 강요하기 위하여 폭력과 협박을 사용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들은 두 가지 때문에 성공하지 못할 것입니다. 첫째로, 자신의 직무를 용감하고 공평하게 수행하기 위해 잘 훈련된 경찰력이 있기 때문입니다. 둘째로, 국민의 대다수는 법이 지켜지기를 원하고 있으며, 위협받지 않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저는 피켓 라인을 뚫고 작업장에 들어간 사람들의 용기에 경의를 표하고자 합니다. 법의 지배는 군중의 지배에 승리할 것입니다.” 이후 아서 스카길이 이끄는 광산노조의 파업은 추진력을 잃었고, 결국 대처는 노조와의 전쟁에서 승리했다. 지나친 권력과 수많은 파업으로 영국 국민과 영국 경제에 많은 고통을 안겨 주었던 노조를 무력화시킨 개혁이 대처의 일관성 있는 신념과 강인한 의지로 실현되는 순간이었다.
3부 미국 신경제 붐을 일으킨 클린턴의 리더십
1장 시대에 맞는 미래 비전을 제시하라
1992년 미국 대통령 선거에서는 대이변이 연출되었다. 당초 조지 허버트 부시 대통령이 압승할 것이라는 예상을 깨고 미국의 유권자들은 결국 미국의 가장 작은 주 중의 하나인 아칸소 주 출신의 신예인 클린턴을 선택했다. 그 결과 무려 12년간의 공화당 집권을 종식시키고 최초의 베이비 부머 세대인 젊은 클린턴이 대통령 선거에서 승리하였다. 클린턴의 승리는 사실 처음에는 아무도 예상하지 못했다. 우선 민주당 출신의 대통령 후보가 당선되기가 매우 어려운 상황이었다. 당시 공화당은 레이건 대통령이 8년 동안 집권하고 그 뒤를 이어 조지 허버트 부시 대통령이 4년 동안 미국 국민들의 지지를 획득하는 데 성공하고 있었다. 특히 레이건의 공화당은 세금인하를 통해 국민들에게 재산을 돌려줌으로써 그동안 경제적 약자를 적극적으로 옹호해 온 민주당에 비해 중산층의 지지를 받아내는 데 성공했다. 그 결과 미국 중산층의 상당수가 공화당을 지지하고 있는 상태였다. 걸프전을 승리로 이끈 부시 대통령은 전쟁 종료 후 갤럽 여론조사상 거의 최고 수치인 89퍼센트의 지지율을 기록했다.
하지만 클린턴이 예상을 깨고 대통령 선거에서 승리한 원인은 무엇인가. 승리의 주요 원인 중의 하나는 바로 클린턴이 부시가 해결하지 못한 문제를 해결하겠다고 나섰다는 점이다. 클린턴은 국방과 외교 문제에 있어서 부시의 공로와 업적을 인정했다. 하지만 미국에는 국방과 외교 문제 외에도 중요한 문제가 많으며 그중에서 가장 중요한 문제는 바로 미래, 경제, 건강보호라고 주장했다. 리더가 국가 문제의 해결을 위한 비전을 제시하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 이러한 비전 제시에서 중요한 것은 국민 대다수가 중요하게 생각하는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비전이어야 한다는 점이다. 클린턴의 경제 문제와 건강보호 문제에 대한 비전 제시 전략은 그러한 측면에서 성공했다.
첫째로, 부시 대통령은 새로운 미래에 적합한 인물이 아니며, 변화를 위해서는 자신이 필요하다고 주장했다. 클린턴은 미국 국민에게 자신이 미래를 연결하는 다리를 건설하는 데 함께 동참해 줄 것을 요청했다.
둘째로, 클린턴은 정체되어 있는 경제 문제의 심각성을 집중 부각시켰다. 국가 채무는 레이건, 부시 행정부 기간 동안 4배가 증가해 약 4조 달러에 달했고, 미국인 8명 중 1명은 빈곤선을 밑돌았으며, 전체 국민의 약 4분의 1은 실업에 직면하고 있음을 중점적으로 비판했다. 또한 부시 행정부의 경제 정책이 이러한 문제를 해결할 수 없음을 적극적으로 부각시켰다.
선거 참모들은 미국 국민에게 클린턴의 메시지를 전달하기 위해 원자탄 개발 프로젝트를 본뜬 소위 ‘맨해튼 프로젝트’를 출범시켰다. 맨해튼 프로젝트를 통해 설정된 클린턴 대통령의 메시지는 크게 네 가지였다.
첫째, 국민을 우선하고, 국민의 안정적 미래를 확보하는 데 투자하라.
둘째, 책임과 함께 기회를 부여하라.
셋째, 중산층을 보호하라.
넷째, 정부를 재창조하라.
클린턴은 이러한 메시지와 함께 구체적인 프로그램을 제시하는 데 주력했다. 중산층에 대한 조세감면, 전 국민에 대한 건강보험 적용, 직업 훈련과 인프라스트럭처에 대한 공공 투자, 교육 개혁 방안 등을 제시했다.
클린턴이 대통령 선거에서 승리하기 위해서는 바로 레이건 대통령을 지지했던 온건 성향의 유권자와 부동층의 표를 가져올 필요가 있었고, 이들을 만족시키기 위해 클린턴은 자신이 ‘새로운 종류의 민주당원’임을 강조했다. 또한 클린턴은 많은 유권자들이 경기불황 등으로 인해 경제적 문제에 불만을 가지고 있는 점을 감안하여 ‘변화’를 선거운동 구호로 삼는 한편, 유권자들이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경제 문제와 건강보호문제를 중심 주제로 삼았다. 그 결과 민주당 대통령 후보 지명 전당대회 전까지 부시에게 근소하게 뒤져 있던 클린턴은 민주당 전당대회를 계기로 본격적인 우위를 확보했다. 이러한 우세를 바탕으로 클린턴은 미국의 42대 대통령으로 선출되었다.
리더는 자신이 속한 정당의 이념과 자신의 신념에 따라 국가의 문제를 해결한다. 예를 들면 미국의 경우 민주당 출신의 대통령들은 경제적 약자 문제, 소득격차 문제의 해결을 위한 재정의 재분배 기능 강화, 사회보장 관련 정부지출의 확대 등의 방법을 통해 해결하는 경향이 있다. 반면 공화당 출신 대통령은 작은 정부를 추구하면서 조세인하 등의 정책을 추진한다. 한편 민주당 출신 대통령은 환경보호 문제에 대해 매우 적극적인 정책을 추진하는 반면, 공화당 출신의 대통령은 환경보호를 위한 정부의 정책이 기업에 대한 규제로 이어지는 것을 반대하는 경향이 있다. 범죄 문제에 대해서도 민주당 출신의 대통령들은 상대적으로 범죄자의 인권에 대해 관대한 태도를 보이는 반면, 공화당 출신의 대통령들은 범죄 문제와 범죄자에 대해 엄격한 태도를 보인다. 이러한 특정한 문제에 대한 리더의 입장 차이는 때로는 리더의 지지도를 제약하는 요인으로 작용한다. 예를 들면 대다수의 국민들은 사회보장지출을 강조하는 민주당의 입장을 지지하면서도 범죄 문제에 대해서는 공화당과 같이 엄격한 입장을 지지할 수 있다. 이럴 때 만일 민주당 출신의 대통령이 대다수 유권자들의 희망을 해결할 수 있다면 그 지지도는 올라갈 수 있다. 1996년 클린턴의 사회적 가치 선점 사례가 그 대표적인 예이다.
사회적 가치 문제는 주로 가족, 범죄, 낙태, 동성 간 결혼, 교육 등 사회와 관련된 가치판단을 요하는 주요 이슈 문제를 의미한다. 그동안 민주당은 사회적 가치 문제에 있어서 공화당에 비하여 열세를 보여 왔다. 클린턴의 선거 전략가인 딕 모리스와 클린턴 대통령은 재선을 위해서는 사회적 가치와 관련된 문제를 공략할 필요성을 절감했다. 클린턴이 사회적 가치 문제를 중요한 국정과제로 제시한 것은 바로 1996년의 의회연설에서였다. 그 의회연설은 여러 가지 면에서 중요하다.
첫째로 클린턴 대통령은 국정 어젠다의 중심을 그동안의 경제 문제에서 가정, 교육, 범죄 등 사회적 가치 문제로 전환했다.
둘째로 사회적 가치 문제에 있어서 종래의 전통적인 민주당 입장을 벗어나 중간자적 입장을 취했다.
그는 사회적 가치 문제와 관련하여 미국 사회가 안고 있는 다섯 가지 도전과 과제를 열거했다.
첫째 아이들을 보호하고 미국 가정을 강화하는 것, 둘째 미국인들에게 교육 기회를 제공하는 것, 셋째 새로운 시대에 경제적 안정성을 보호하는 것, 넷째 거리에서 범죄와 갱, 마약을 추방하는 것, 다섯째 다음 세대를 위해 환경을 안전하고 깨끗하게 만드는 것이라고 주장했다. 클린턴은 이러한 도전과 과제를 해결하기 위해 구체적인 해결 방안을 제시했다.
첫째로, 아이들과 가정의 보호를 위해서 TV수상기에 ‘브이칩’이라고 불리는, 어린이들이 보기에 부적절한 폭력 장면 등의 내용을 여과할 수 있는 장치를 의무 설치할 것을 제안했다. 또한 ‘부양아동이 있는 저소득층가정 지원제도’를 의미하는 웰페어(welfare)에 빈곤 가정들이 지나치게 의존하는 것을 개혁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둘째로, 미국 국민에게 교육 기회를 제공하기 위해 학교와 교실에 컴퓨터와 인터넷 보급을 늘리고, ‘목표 2000년’ 계획을 통해 미국 교육을 향상시키며, 대학 학자금 지원을 확대해서 미국 국민에게 대학교육의 기회를 넓힐 것을 제안했다.
셋째로, 미국 국민의 경제적 안정성을 높이기 위해 연금제도를 보존하며, 직장이 바뀌거나 가족들 중 일부가 아프더라도 건강보험 혜택을 잃지 않도록 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제안했다.
넷째로, 범죄 문제와 관련해서는 경찰력의 확대와 범죄에 대한 강력한 처벌의 필요성을 강조했다. 하지만 미국의 젊은이들이 범죄 유혹에 빠지지 않도록 공동체에 의해서 예방적 조치들이 행해져야 한다고 주장했다.
다섯째로, 환경의 보전과 관련해서는 환경보호를 위해서 더 많은 노력이 필요하다고 강조하면서도, 정부 규제보다 저렴하고 능률적인 방법이 있다면 이를 통해서 달성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주장했다.
그는 또한 사회적 가치 문제와 관련하여 중간적인 입장을 제시했다. 예를 들어 웰페어와 관련해서 그동안 민주당은 적극적으로 확대하자는 입장이었고, 공화당은 대폭적인 축소를 주장하는 입장이었는데, 클린턴은 중간자적 입장을 제시했다. 그는 이 제도가 미국 가정과 아이들을 보호하기보다는 가정과 근로의 가치를 잠식하는 결과를 가져왔다고 주장했다. 그는 빈곤 가정 지원 수혜기간의 제한, 그 대가로서 강력한 근로 요구 등을 통한 개혁 방안을 제시했다. 하지만 그러면서도 근로 여성의 자녀들에 대한 보육의 기회를 제공함으로써 근로 여성이 업무에 전념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재정적자 문제에 관련해서는 빠른 시간 내에 균형재정을 달성하고 재정적자를 매년 반드시 감축하는 한편, 메디케어(Medicare, 고령자건강보호제도), 메디케이드(Medicaid, 저소득층건강보호제도), 교육, 환경 보호 등에 대해서는 확고한 우선순위를 부여하였다. 범죄 문제와 관련해서는 범죄에 대해 중벌을 부과하고 사형 제도를 유지하는 한편, 권총과 공격용 무기에 대한 통제를 강화하되, 스포츠용으로 사용되는 사냥용 총기에 대해서는 지나친 통제를 풀었다. 1996년 의회연설에 클린턴 대통령은 이러한 중간자적 입장을 확고하게 보임으로써 당파적 대통령이 아니라 국민의 대통령으로 자리매김하려고 노력했다. 사회적 가치는 그동안의 공화당의 주요 어젠다였다. 하지만 클린턴 대통령은 공화당이 주장해 오던 사회적 가치 문제를 포용하여 자신의 어젠다로 만드는 한편 이에 대한 긍정적 어젠다를 제시함으로써, 부정적 어젠다 위주의 공화당에 대한 매력을 떨어뜨렸다. 클린턴이 그동안 공화당의 전유물처럼 여겨오던 사회적 가치 문제를 선점하고, 공화당과 민주당의 중간적인 입장에서 적극적으로 해결해 나감으로써 균형 잡힌 대통령의 모습을 보였던 점이 클린턴의 지지율 상승과 재선 성공에 많은 역할을 한 것으로 보인다.
2장 경제 문제와 미래 문제를 해결하라
대통령에 당선되고 난 후 자신의 공약을 포기하기는 쉽지 않다. 우선 공약 자체가 대통령 후보자들의 신념을 바탕으로 만들어진 것이어서, 공약은 대통령에게는 자신이 얼마나 약속을 지키고 일관성을 가지느냐를 보여주는 척도가 될 수 있다. 공약을 제대로 이행하지 않을 경우에는 대통령의 공약을 믿고 지지했던 유권자들에게 엄청난 실망감을 안겨 주기 때문에 쉬운 일이 아니다. 특히 미국은 민주당과 공화당의 이념과 정책적 지향점이 서로 상이하고 비전과 정책을 중심으로 대통령을 선택하는 경우가 많아 이러한 상황은 미리 예견된 일이기도 하다. 또한 자신의 공약을 폐기하는 것은 대통령 당선 시절부터 자신을 보좌하는 대통령 당선에 기여한 참모들에게도 좌절감을 안겨 준다. 하지만 클린턴 대통령은 이러한 여러 가지 부작용에도 불구하고 재정적자 감축 추진방안을 과감히 받아들이는 결단을 내렸다. 이러한 재정적자 감축 추진과 세율인상은 클린턴에게 균형재정의 달성이라는 미국 역사상 유례가 드문 성과를 가져다주었다. 이는 클린턴이 자신의 비현실적인 선거공약을 포기하고 경제 문제의 근본적인 해결을 취한 처방을 내렸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클린턴은 경제 문제의 해결을 위해서는 적과의 동침도 마다하지 않았다. 정치 지도자들은 자신이 속한 정당의 전통적 지지계층에 지나치게 포위되는 경우가 많다. 그 결과 상이한 입장에 있는 사람들의 주장이나 생각을 공격하면서 자신의 지지계층을 결집시키기도 한다. 하지만 적을 공격하는 것보다 오히려 자신을 반대하는 사람들의 주장을 포용함으로써 그들의 지지를 이끌어 내거나 반대를 완화하는 등 소위 적과의 동침까지도 마다하지 않는 것이 유효한 리더십 전략일 수 있다. 클린턴 대통령이 경제 문제의 해결을 위해 적과의 동침을 마다하지 않은 사례로는 미국 월스트리트 기업인들 공략, 북미자유무역협정 수용, 재정적자 감축 정책의 추진 등 세 가지를 들 수 있다.
한 국가가 직면하는 문제는 다양하다. 어떤 문제는 오랜 기간 동안 지속된 구조적인 문제이기도하고, 어떤 문제는 새로운 시대의 흐름이 제기하는 문제이기도 하다. 이러한 새로운 시대가 요구하는 문제, 미래사회에 대응하는 문제를 효과적으로 해결한다면, 리더에 대한 평가는 높아진다. 새로운 시대가 요구하는 문제 또는 미래사회에 대응하는 문제 중 대표적인 것이 기술이다. 1990년대는 미국에 정보통신시장 붐이 크게 일어났던 시기이다. 1980년대가 정보통신기술이 전문가들에게만 제한적으로 이용되었던 시기였다면, 1990년대는 미국의 많은 국민들이 정보통신기술을 실생활에서 체험하고 응용하는 것이 급속도로 확산된 시기이다. 인터넷의 광범위한 활용은 증권시장인 월스트리트를 자극하기 시작했다. 소위 닷컴기업으로 불리는 인터넷 및 정보통신기업과 미국의 금융기법이 결합됨으로써 벤처 캐피털로 불리는 모험자본의 투자와 기업공개가 활발하게 이루어졌다. 많은 벤처 캐피털이 정보통신기업에 투자하기 시작했으며, 정보통신기업들이 주식을 상장해 뉴욕의 나스닥 시장에서 거래되었다. 새로 생긴 정보통신기업들은 전문가들과 일반인들 사이에서 그 전망이 밝은 것으로 예상되었으며, 그 결과 주식시장은 벤처 붐을 이루었다. 특히 1996년의 통신 규제완화, 1998년과 1999년에 발생한 Y2K 문제, 1999년과 2000년 사이의 정보통신기업에 대한 거품은 정보통신기술에 대한 투자를 엄청나게 늘리는 효과를 가져왔다.
정보통신 분야를 중심으로 한 기업의 투자 증가와 주식시장의 활황으로 인한 부의 증대 효과로 빚어진 소비 증가는 미국 경제의 생산성 향상과 경제성장에 큰 동력으로 작용했다. 1973년 이후 미국 경제의 노동생산성은 하락하기 시작하여 1973년부터 1992년까지의 노동생산성은 연평균 1.4퍼센트 증가하는 데 그쳤다. 클린턴 행정부 시절에는 이러한 노동생산성이 다시 증가하기 시작하여 연평균 2.7퍼센트 증가하였다. 클린턴 임기 동안의 노동생산성 증가는 컴퓨터와 네트워킹에 대한 투자 증가에 기인한 측면이 분명히 있다고 평가할 수 있다. 1990년대 중반부터 2000년까지 미국 경제는 큰 호황을 구가했다. 클린턴 대통령의 재임기간 중 경제성장률은 연평균 2.7퍼센트에 달했고, 인플레이션은 3퍼센트 이하에서 안정적으로 움직였다. 아울러 실업률은 임기 후반 내내 5퍼센트 미만에 머물렀다. 하버드 대학의 제프리 프랜클과 브루킹스 연구소의 피터 오스작은 1990년대 미국 경제의 호황과 성과를 세 가지 원인으로 나누어 설명했다. 이들은 미국 경제의 장기성장의 원인으로, 첫째 단기적 요인인 물가 안정, 둘째 중기적 요인으로 건전한 거시경제 정책, 셋째로는 장기적 요인으로 규제완화, 국제화, 혁신 등을 제시하고 있다.
4부 대처와 클린턴에게 배우는 성공과 실패의 리더십
이제는 이슈와 정책 리더십의 시대이다
그동안 많은 국민들은 정치지도자를 선택할 때에 그 지도자의 정책과 이슈에 대해 상세하게 알지 못했다. 정치지도자가 제시하는 특정한 이슈에 대한 입장보다는 지도자로서의 이미지 등에 많이 의존하는 경향을 보였다. 대처와 클린턴을 높이 평가하는 것 중 하나는 국민이 정치지도자들을 평가할 때 이미지보다는 이슈에 대한 입장과 정책을 중요시하게 만든 점이다. 두 사람 모두 정책과 이슈의 세세한 내용까지 이해했으며, 국민들에게 구체적으로 자신들의 입장을 설명했다. 대처와 클린턴 모두 정책에 대한 이해가 깊은 리더였다. 대처와 클린턴이 집권한 후 많은 사람들은 리더가 제시하는 비전과 정책에 대해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 또한 삶의 질을 중시하는 실용주의적 경향도 이러한 이슈와 정책의 중요성을 높이는 계기가 되었다. 지도자의 이미지보다는 그들이 집권 후 시행할 정책이 국민의 소득과 삶의 질에 미치는 영향을 좀더 중시하는 시대가 온 것이다.
이념 과잉과 도덕적 권위 실종을 경계하라
대처는 자본주의와 시장경제, 그리고 보수주의의 우월성에 대한 불변의 확신과 신념을 가지고 있었다. 보수주의가 노동당의 사회주의에 비해 훨씬 우월하며 영국은 보수주의를 통해서만 번영할 수 있다고 믿었다. 대처의 이러한 보수주의의 우월성에 대한 확신은 대처 재임 중 공급 중시 경제 정책을 확고부동하게 추진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하지만 대처의 보수주의의 우월성에 대한 확신은 사회주의 강령을 채택하고 있는 노동당의 지지 세력과 노동당의 강령에 대한 무자비한 공격으로 연결되었다. 대처가 보수당의 이념을 확산하고 노동당의 세력을 와해시키고자 하는 전략은 무난하게 성공을 거두었다. 하지만 보수당 이념에 대한 지나친 우월의식은 결국 중대한 실패를 가져오는데, 인두세 도입이 대표적인 예이다.
대처는 재정지출의 삭감 등을 통해 노동당이 지배하고 있는 지방정부에 대한 지원을 삭감하였다. 하지만 지방정부는 레이츠라고 불리는 주택과 기업용 부동산에 대한 재산세를 인상함으로써 부족한 재원을 충당하고자 하였다. 이러한 재산세 인상 정책은 보수당이 중요하게 생각하는 주택소유자와 기업들에 대한 부담을 늘리는 것이었다. 대처는 이러한 점을 감안하여 노동당이 주도하는 지방정부의 권한을 약화시키고 지방정부가 재산세를 인상하는 것을 차단하기 위해, 1988년 초에 18세 이상의 모든 주민들을 대상으로 세금을 징수하는 인두세를 도입하기 위한 법안을 제출했다. 하지만 인두세는 개인들의 부담 능력과는 상관없이 기본적으로 모두 동일한 세금을 부과하는 조세형평 면에서 문제가 많은 세금이었다. 또한 지방정부는 대처의 예상과는 달리 인두세를 대폭 인상함으로써 오히려 국민들의 세금 부담이 늘어나는 결과를 초래했다. 그 결과 국민들의 반감은 대처와 보수당에게 집중되었다. 급기야 1990년 3월 31일 런던에서는 인두세 도입에 반대하는 약 20만 명의 시위대가 시위를 벌였다. 보수당의 이념에 대한 지나친 우월의식과 노동당을 무력화하려고 하는 대처의 전략이 역으로 국민들의 대대적 저항이라는 역풍을 맞게 된 것이다.
클린턴은 1998년부터 본격적으로 불거진 모니카 르윈스키와의 스캔들로 인하여 정치적 곤경을 겪었다. 공화당은 이러한 클린턴의 약점을 집요하게 파고들었다. 공화당 강경우파인 스타 독립검사와 역시 공화당 강경파인 깅리치 하원의장이 주도하는 공화당 의회는 1998년 말 클린턴 대통령에 대한 탄핵을 추진했다. 클린턴 대통령은 우여곡절 끝에 자신의 탄핵사유가 되었던 위증 및 사법방해죄와 관련하여 상원에서 탄핵안이 부결됨에 따라 정치적으로 소생했다. 클린턴 대통령의 스캔들, 탄핵과 관련하여 흥미로운 사실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클린턴 대통령의 지지도는 상대적으로 높은 수준을 기록했다는 것이다. 이는 미국 국민이 대통령의 공적인 업무와 사적인 행동을 분리하여 평가한 영향이 크다. 하지만 클린턴은 이러한 스캔들 과정에서 도덕적 권위를 상실함에 따라 자신이 1996년 초부터 중점적으로 추진해 온 가족, 범죄, 청소년 등 사회적 가치 관련 정책의 모멘텀을 상실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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