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Con 스티브 잡스
1부 환희와 좌절
1. 뿌리
스티브 잡스는 1955년 2월 24일 캘리포니아의 샌프란시스코에서 태어나, 10년 동안 아기를 낳지 못한 폴과 클래라 잡스 부부에 입양되었다.
잡스는 새벽 4시부터 깨어나 부모를 괴롭히는 “과잉활동아”였고, 또래 아이들과는 잘 어울리지 못하는 “아주 별난” 아이, 악명 높은 말썽꾸러기였다. 그러나 스티브는 열 살이 되면서 각종 전자기기에 매료되었고 상상력을 동원해 거기서 무한한 가능성을 보았다.
1967년 중학생이 된 스티브는 자신과 같이 전자기기에 남다른 관심을 보인 빌 페르난데스를 만났다. 당시 페르난데스의 집 길 건너 맞은 편에는 스티븐 워즈니악(워즈)이 살고 있었는데 그 역시 전자 분야에 관심이 많았다. 하루는 페르난데스가 스티브 잡스를 자기 집 차고로 초대해 워즈와 함께 만든 컴퓨터를 보여 주었다. 이 때가 워즈와 스티브 잡스의 첫 만남이었다. 당시 열여덟 살이었던 워즈는 이미 진정한 전자공학도였지만, 다섯 살 아래인 페르난네스와 스티브는 아직 전자공학에 관한 실제 지식이 부족한 풋내기에 불과했다. 그날을 계기로 스티브는 컴퓨터에 깊은 관심을 보이기 시작했고 그러면서 스티브 잡스와 워즈니악 사이에 우정이 싹트기 시작했다. 둘 다 짓궂은 장난을 좋아한다는 점도 서로가 가까워지는데 한 몫을 했다. 위즈가 계약을 세우면 말썽꾼이 되고 싶어 안달이 난 스티브가 그것을 실행에 옮겼다. 실제로 잡스는 열여섯 살 때 워즈니악과 함께 공짜로 장거리 전화를 걸 수 있는 ‘블루박스’를 만들어 팔다 AT&T에서 나온 사람이 들이대는 총에 죽을 뻔한 일도 겪곤 했다.
2. 애플의 탄생
스티브 잡스의 독특한 특성은 이중적인 지향성(사업가로서, 그리고 한편으로 독실한 선불교 신자로서)이라고 할 수 있다. 생각이 자유롭고 어디에도 얽매이지 않으며, 세상의 부조리함을 이해할 방도와 마음 깊이 담아 둔 의문점의 해답을 찾고 있었던 스티브에게 선불교의 매력은 대단한 것이었다.
1975년 워즈가 자신이 만든 인쇄회로기판(PCB)을 스티브에게 보여 주자 스티브는 그것을 기반으로 사업을 할 수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당시 회로기판은 이미 다른 사람들도 판매하고 있어 마케팅에 조예가 깊었던 스티브는 자신들의 제품을 차별화 할 수 있는 독특한 이름이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팝송을 좋아했던 스티브는 오리건 주의 사과 농장에서 선(禪) 애호가들과 많은 시간을 보내던 중 ‘애플(Apple)’이라는 이름을 생각해냈다. 그리고 마침내 1976년 ‘애플 컴퓨터’라는 이름으로 합자사업 개시를 발표했다.
이 때만 아무도, 심지어는 스티브마저도 이것이 거대한 사업이 될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그렇지만 그들은 앞으로의 가능성을 생각했고 그래서 첫 제품을 ‘애플Ⅰ'으로 명명했다. 그리고 애플은 그 해말 갓 태어난 어설픈 상태였음에도 약 150대를 납품해 무려 10만 달러에 육박하는 매출을 올렸다.
그러나 시간이 흐를수록 애플Ⅰ의 판매가 정체 상태를 보이자 워즈와 스티브는 운영체제(OS)에 관해 중요한 결정을 내렸다. 당시 경쟁상품인 앨테어 컴퓨터는 하버드를 중퇴한 빌 게이츠와 폴 앨런이 만든 베이직(BASIC)을 운영체제로 사용하고 있었고 게이츠와 앨런은 BASIC을 설치하는 컴퓨터마다 500달러를 받기로 하고 이 프로그램을 컴퓨터 제조업체에 팔고 있었다. 스티브와 워즈는 무료로 사용할 수 있고, 회로기판의 칩에 저장할 수 있는 프로그램 언어를 제공하겠다고 결심했다. 그리하여 컴퓨터를 켤 때마다 매번 먼저 운영체제를 가동해야 하는 번거로움을 없애고 자동적으로 운영체제를 가동함으로써 기술에 대한 지식이 없는 사람들도 쉽게 사용할 수 있게 한다는 것이었다. 이렇게 하여 애플Ⅱ가 구상되었다.
1976년 후반 스티브 잡스는 애플Ⅱ의 설계를 반드시 완성하여 회사를 키워야 하는 절박한 상황에 이르렀다. 그러자 잡스는 자신의 한계를 정확히 인식하고, 뛰어난 인재를 찾아내 끌어들이는 비상한 수완을 발휘했다. 그는 제품에 대한 세일즈맨적인 열성, 전도사의 신념, 한 가지 목표에 매진하는 열성당원의 결의, 사업에 성공하겠다는 가난한 청년의 결심으로 무장하고 있었다. 그의 이러한 특성들은 훗날 애플의 성공을 이끌어 낸 씨앗이 됨과 동시에 사람들을 자신의 적으로 만든 독소도 되었다.
1977년 1월, 그 동안 애플의 사업 계획을 수립해주고, 초기에 가장 많은 투자를 했던 벤처자본가 마이크 마쿨라의 집 수영장에서 스티브와 워즈, 그리고 마쿨라, 세 사람이 만나 마침내 애플을 주식회사로 전환하는데 합의했다. 그리고 당시 내셔널 세미콘덕터의 이사 마이크 스콧을 사장으로 영입했다. 스콧은 세상 물정에 밝고 배짱과 결단력이 강한 인물로 스티브와는 전혀 어울리지 않았다. 그리하여 두 사람은 오랫동안 경영권 다툼을 벌이게 된다.
1977년 웨스트코스트 컴퓨터 박람회장 문이 열리자 안으로 몰려든 관람객들은 난생 처음 보는 멋진 퍼스널 컴퓨터를 보게 되었다. 애플Ⅱ는 전문가용 컴퓨터처럼 보이면서도 미끈한 외모를 자랑했다. 부스 안에서 직원들이 애플Ⅱ를 가동하자 대형 화면에 역동적인 이미지가 선명한 색채로 나타났다. 관람객들은 이 작은 케이스 안의 전자공학 시스템으로 이런 게 가능한지 믿을 수 없었고 잡스는 뒤에 대형 컴퓨터가 숨어 있지 않다는 걸 보여주기 위해 장막을 계속 걷어 올려야 했다.
3. 해적이 되자!
1979년 후반 애플은 퍼스널 컴퓨터 시장을 거의 장악했다. 1980년에는 판매고가 다시 두 배로 늘어났고 애플 컴퓨터는 사실상 경쟁자가 없었다. 회사가 이처럼 승승장구하는데도 스티브 잡스는 행복하지 않았다. 애플Ⅱ는 사실상 워즈가 만든 것이었기 때문이다. 스티브는 모든 사람들이 ‘스티브의 컴퓨터’라고 인정하는 그런 제품을 내놓고 싶었다. 그는 지금까지 나온 것을 훨씬 능가하고 자기 외에는 누구도 꿈꾸지 못할 컴퓨터를 머릿속에 그리고 있었다. 그리고 자기 딸의 이름을 따 그 컴퓨터의 이름을 ‘리사(LISA)'라고 지었다.
머지 않아 스티브의 강력한 지원을 받은 리사 개발 팀이 구성되었고 이들은 엘리트 의식이 강해 다른 직원들의 반감을 샀다. 스티브는 리사에 대해 굉장한 자부심을 가졌고 ‘우주에 영향을 미칠 만큼 중요한 컴퓨터를 만들겠다’고 호언하곤 했다. 그런데 리사를 컴퓨터로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다 할 수 있는 컴퓨터로 개발하려고 하다보니 처음 2.000달러로 책정했던 가격이 출시할 때는 10,000달러가 되었다.
1980년 첨단 컴퓨터 연구의 요람인 제록스 팰러앨토 연구센터(PARC)를 찾은 스티브 잡스는 엄청난 광경을 목격하고 이렇게 외쳤다. “이 좋은 걸로 왜 가만있냔 말이야! 이건 대단한 거야. 혁명이란 말이야, 혁명!” 이것이 바로 지금처럼 마우스로 스크린에 있는 포인터를 움직여 원하는 프로그램을 여는 방식인 그래픽 사용자 인터페이스(GUI)였다. PARC 사람들은 지금까지 PARC를 방문한 수많은 사람들 가운데 자기네들의 연구가 무엇을 의미하는지 알아본 사람은 스티브 잡스 뿐이라고 말했다. 상승세를 타기 시작한 애플은 1980년 직원이 200명으로 늘어났고 계속해서 600명, 1,000명 이상으로 불어났다.
1980년 12월 애플의 주식 공모가 시작됐다. 애플 컴퓨터의 공개 주식 460만 주가 한 시간 만에 팔렸다. 당시로서는 사상 초유의 주식 공개였으며, 1950년대 중반 포드 사의 주식 공개 이래 모집 신청률 이 가장 높았다. 학벌도 돈도 경험도 없는 두 젊은이가 5년도 안 걸려서 <포춘>선정 500대 기업으로 성장했다. 그리고 스티브는 하룻밤 사이에 2억 1,750만 달러의 자산을 보유함으로써 전설적인 부호의 대열에 합류했다. 물질적인 면에서 스티브 잡스는 이제 원하는 것은 무엇이든 가질 수 있었다. 게다가 돈은 권력을 수반했다. 그러나 탐욕에 사로잡힌 스티브는 창업초기에 회사를 위해 혼신을 다해 열정을 바쳤던 직원들에게 스톡 옵션을 주지 않았고 많은 직원들이 배신감을 느낀 채 회사를 떠났다.
그 무렵 애플에서 일하고 있던 캘리포니아 대학 교수 출신 컴퓨터 과학자 제프 래스킨이 일반 대중을 위한 작고 저렴한 컴퓨터를 개발하고 있었다. 래스킨은 이 컴퓨터를 ‘애플’의 정신에 부합하도록 그가 제일 좋아하는 사과 품종의 이름을 따 ‘매킨토시(Macintosh)’라 이름지었다. 래스킨은 추가 장치가 필요 없이 그것 자체로 완벽한 솔루션이 될 수 있는 컴퓨터를 개발하고자 했다. 그러나 스티브는 리사의 개발만을 강조했고 매킨토시는 오히려 애플에 장애가 된다고 생각했다. 그리하여 래스킨의 아이디어는 취소와 추진되기를 반복했다.
1981년 초반 스티브는 넘치는 에너지를 쏟아 부을 신제품을 찾고 있었다. 그러던 가운데 자신이 초기에 거부했던 매킨토시로 다시 관심을 돌렸다. 매킨토시는 당시 공식 프로젝트로 진행되고 있던 리사보다 처리 속도가 두 배나 빠른데도 가격이 리사의 3분의 1에 불과했다. 스티브는 회사의 비대해진 관료 체제가 애플Ⅲ의 개발을 망쳤고 리사까지 잘못 처리하고 있다고 생각하고 자신이 모든 것을 제대로 해 보이고 싶었다. 스티브는 마침내 래스킨에게 매킨토시를 차세대의 획기적인 컴퓨터로 만들 것을 제안했고 자신이 직접 그 프로젝트에 더욱 깊이 관여하겠다는 점을 분명히 했다.
스티브가 래스킨의 프로젝트에 관심을 보이자 마쿨라와 스콧은 말썽꾼 스티브를 회사의 다른 부분과 분리시킬 수 있는 좋은 기회라고 생각하여 래스킨의 프로젝트에 전념하도록 유도했다. 마침내 스티브는 매킨토시 프로젝트의 총괄 임원이 되었다. 스티브가 래스킨을 밀어내고 매킨토시 팀에 합류하자 그 프로젝트는 각광을 받게 되었다. 그는 애플 내에서 가장 뛰어난 인재들을 막무가내로 자기 팀에 끌어들였다. 또한 리사 팀으로부터 가치가 있을 만한 것은 모두 빼냈다. 이제 매킨토시 팀은 다른 사람들의 간섭을 받지 않은 외인부대였으며 사상 최고의 컴퓨터를 프로젝트 개시 2년 만에 시판한다는 목표 하에 사내 다른 팀이나 업계의 다른 회사들이 얼이 빠질 정도로 신속하게 움직였다.
1982년 9월 말 매킨토시 팀은 파하로듄스에서 두 번째 워크샵을 가졌다. 그 때 팀원은 거의 100명에 이르렀다. 스티브는 칠판에 슬로건을 적었다. “해적이 되자!(Let's Be Pirates.)" 매킨토시 팀의 정신을 정확히 짚은 표현이었다. 우레와 같은 환호성이 터졌다. 그 슬로건 밑에 그는 또 다른 글을 적었다. ”주 90시간 작업, 즐기면서 일하자!“ 팀원들의 분투를 촉구하는 말이었다. 아마도 스티브라면 로마 전함의 노를 젓는 노예들도 고매한 일에 동참한다고 생각하고 채찍도 기쁘게 맞아가며 일할 수 있게 만들 인물이었다.
1982년 <타임> 신년 특집호는 PC를 “올해의 기계”로 선정했고, 스티브 잡스의 얼굴이 표지에 실렸다. 잡지를 넘기던 스티브는 충격을 받았다. 거기에는 워즈니악이 “스티브는 회로판 하나, 디자인 하나, 코드 하나도 직접 만들지 않았다.”고 말한 것으로 적혀 있었다. 그리고 그 밖의 다른 내용들을 종합하면 독자들은 결국 스티브는 창의력도, 기술도 없으면서 결국 남의 뒤에서 재산이나 모으려고 음모를 꾸미는 사람이라는 인상을 받기에 충분했다. 생각이 깊고 지성적인 사람이었다면 그런 비난을 진지하게 받아들이고 그 중 어떤 것이 정당한지 판단한 뒤 고쳐보려고 노력했을 것이다. 그러나 스티브는 그렇게 하지 않았다. 오히려 그는 그들이 틀렸다는 것을 증명하고 싶었다. 그리고 매킨토시를 출시하면 그들이 앞서 한 말을 취소할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1983년 5월 16일 스티브와 그의 팀원들이 목표로 했던 매킨토시 출시일은 리사의 출시 지연과 함께 뒤로 밀리고 말았다.
1983년 스콧의 퇴임 후 잡스의 경영 방식에 불만을 품은 이사회가 잡스에게 경영권을 주지 않으려 하자, 잡스는 차선책으로 자신이 통제할 수 있다고 판단한 경영의 귀재 존 스컬리를 사장으로 영입했다. 이미 펩시콜라와 훌륭한 조건의 계약을 맺은 스컬리에게 잡스는 이렇게 말했다. “정말 중요한 일을 할 수 있는 기회가 있는데도 설탕물이나 팔며 남은 인생을 허비하실 생각인가요?” 이것은 미국 비즈니스 역사에 전설이 된 일화이다.
마침내 1984년 1월 16일 매킨토시 개발 팀은 모든 버그를 수정하고 출시 준비를 마쳤다. 곧이어 미국 전역에 곧 출시될 매킨토시에 관한 이야기가 퍼지기 시작했다. 스티브와 존 스컬리는 매킨토시에 “회사의 운명을 걸었다”고 이야기했다. 잡스는 다음과 같은 텔레비전 광고를 냈다.
“1월 24일은 애플 컴퓨터가 매킨토시를 소개하는 날입니다.
그때 당신은 왜 우리의 ‘1984년’이 조지 오웰의『1984년』과 다른지 알게 됩니다.”
독창적이며 스펙터클한 이 광고는 단숨에 시청자들의 눈길을 사로잡았다. 작고 세련된 디자인의 매킨토시는 아이콘 클릭으로 프로그램을 여는 그래픽 사용자 인터페이스(GUI)를 사용함으로써 컴퓨터 역사에 일대 혁명을 가져왔다. 잡스는 “비현실적인 목표를 세우는 데 일가견”이 있었지만, 그는 결국 꿈을 이루었다.
4. 실패의 쓴맛
사람들은 스티브 잡스가 내뿜는 독특한 분위기에 사로잡혀 그의 단점을 잘 보지 못했다. 스컬리는 여전히 스티브가 구름 위를 걷고 있으며 새로 출시된 매킨토시 판매 수치를 터무니없이 높게 예상했다고 생각했다. 스티브가 예상한 1984년 첫해 판매 목표는 75만대였다. 세상은 애플을 주목했고 미래의 회사가 어떻게 운영되어야 하는지를 보여 주는 모델로 여겼지만, 회사 내부에서는 파워 게임이 벌어지고 있었다. 분열은 불가피했다.
매킨토시가 출시된 후 스컬리는 매킨토시 팀과 리사 팀을 합치기로 결정을 내렸고 여기서부터 모든 불운이 시작되었다. 조직을 새로 정비한 날 두 팀이 중앙홀에 모두 모이자 스티브는 리사 팀을 향해 다짜고짜 “당신들은 정말 형편없어!”라고 말문을 열었다. 그 때 리사 사람들의 눈에는 적의가 번득였다. 결국 스티브의 고집스럽고 자기중심적인 태도는 자신의 몰락을 재촉했다. 그 날 그가 보인 모습은 앞날을 예고한 전조였다. 이것은 스티브가 애플의 미래에 대한 비전에 인간적인 면을 빠뜨리고 지금까지 회사를 지탱해 준 인간적 가치를 외면하고 있다는 인상을 주었다. 자신이 모든 회사 운영을 도맡아 할 것이고 이제는 그럴 때가 왔다는 속마음을 드러낸 것이다. 사장은 존이었다. 하지만 파워는 스티브에게 있었다.
시간이 흐르면서 매킨토시의 문제점이 드러나기 시작했다. 무엇보다도 매킨토시는 내세울 만한 소프트웨어가 거의 없었다. 매킨토시는 응용 프로그램이 수천 개도 넘는 IBM 컴퓨터와 경쟁하고 있었다. 그것은 좋아할 수는 있어도 구입하기는 싫은 장난감, 약간 색다른 기계로만 보였다. 매출은 계속 하락했다. 낙관적인 판매 예측에 따라 구축한 1,000개에 육박하는 판매조직이 수익을 얻지 못해 휘청거렸다. 스티브는 사람들이 컴퓨터에 수천 달러를 쓸 때는 모양이나 색깔 그리고 마우스의 유무 따위에는 신경 쓰지 않고 오직 컴퓨터만을 중요하게 생각한다는 사실을 간과했다. 마침내 불만과 분노가 애플 건물 내에 팽배해지기 시작했다. 애플Ⅱ 조직은 회사에서 언제나 천민 취급을 받고 있었다. 그 와중에 스티브를 비롯한 회사의 귀족들은 급격한 매출 부진과 더불어 실패를 향해 곤두박질하고 있었다. 게다가 존 스컬리는 그들을 통제하지 못했다. 보스의 별난 행동으로 회사의 리더십이 급속히 흔들렸다.
마침내 1985년 4월 11일 이사진은 스컬리에게 더 이상 스티브 잡스의 아첨꾼 노릇은 하지말고 자기 역할에 맞는 행동을 하라고 말했다. 변화의 기운을 감지한 스컬리가 이사회 의장으로 참석하고 있던 스티브 앞에서 회사 운영의 전권을 달라고 요구하며 그래야만 회사을 정상화할 수 있다고 말했다. 몇 분 안에 상황은 종료되었다. 스티브는 더 이상 매킨토시 조직을 운영하지 않게 되었고, 스컬리가 실권을 장악했다. 스티브는 충격을 받고 말없이 회의실을 나갔다.
9월 13일 금요일 스티브가 새로운 회사를 세운다는 소식이 애플에 들불처럼 퍼졌다. 애플의 비저너리가 애플을 버린다는 사실에 직원들은 충격과 환멸을 느꼈다. 그리고 1985년 9월 17일 퍼스널 컴퓨터의 열정적인 전도사로 지난 10년을 살아온 스티브는 자신이 세운 회사에 사직서를 제출했다. 며칠 후 스티브는 새 회사의 이름을 발표했다. 넥스트(NeXT)였다. 다섯 명이 잡스를 따라 애플에서 나왔고, 잡스에게 선택받지 못한 매킨토시 팀원들은 실망을 느꼈다. 애플 중역들은 충격을 받았고, 애플과 잡스 사이에 법적 공방으로 치닫는 신경전이 벌어졌다.
2부 환희와 좌절
5. 넥스트 스텝
넥스트는 스티브가 애플에서 맛본 실패를 충분히 반성하지 않고 아직도 자신이 쫓겨난 까닭을 알지 못한 상태에서 치밀한 계획 없이 급히 세운 회사였다. 그는 최고로 우수한 인재를 애플에서 스카우트해서 자기가 바로 애플의 심장이자 영혼이었음을 세상에 증명하고 싶었다. 처음에는 모든 것이 그의 뜻대로 이루어지는 것처럼 보였다. 후에 대통령 선거에 출마하오는 독불장군 기업가 로스 페로가 넥스트에 투자를 자청했고 2,000만 달러를 투자했다. 넥스트 창업 초창기에 스티브는 연거푸 거창한 성명을 발표했다. 특히 첨단 로봇 기술로 작동하는 넥스트 컴퓨터 제조공장은 그가 열정적으로 자랑하고 다니는 이슈였다. 그러나 그가 이미 매킨토시 팀을 이끌 때 알았던 것처럼 제품에 대해 떠드는 것과 실제로 제품을 만드는 것은 전혀 별개의 문제였다.
1989년 마침내 넥스트 컴퓨터 큐브가 요란한 판촉행사와 함께 출시되었다. 넥스트의 첫 번째 컴퓨터는 세련된 큐브 모양에 플로피 디스크 대신 아무도 쓰지 않는 광자기 드라이브(MOD)가 장착된 컴퓨터다. 역시 잡스다운 혁신적인 제품이었지만, 그만큼 비쌌다. 잡스는 항상 시대를 너무 앞섰다. 최신식 공장에서 제조된 이 제품은 언론의 대대적인 주목을 받았지만 소비자들에게는 흑백 화면을 갖춘 그저 그런 컴퓨터에 불과했고 시장의 반응도 시원치 않았다. 당시에 진짜 전쟁은 마이크로소프트의 윈도와 IBM의 OS/2 사이에 벌어지고 있었고 넥스트스텝(NeXTSTEP)이라는 독특한 운영체제을 갖춘 넥스트 컴퓨터는 끼어들 틈이 없어 보였다. 스티브 잡스는 소매를 걷어 부치고 판매 일선에 나섰지만 그의 이러한 노력도 무위에 그치고 말았다.
사실 스티브는 이전에 좋은 기회를 놓치고 말았다. IBM이 넥스트의 컴퓨터 운영체제인 넥스트스텝을 사용하기 위해 협상을 해 온 적이 있었다. 그러나 스티브는 여전히 세상이 자신을 향해 달려오게 할 수 있다고 믿었고 처음부터 협상을 까다롭게 이끌어나갔다. 그는 IBM과 제휴함으로써 얻을 수 있는 후광과 무적의 보호막을 너무 과소평가 했던 것이다. 그리고 마침내 협상은 무산됐다. 만일 이 때 스티브가 IBM과 손을 잡았더라면 지금 손 하나 까닥 않고도 PC 한 대가 팔릴 때마다 로열티를 챙기는 주인공이 빌 게이츠가 아니라 스티브 잡스일 수도 있었다.
6. 쇼비즈니스
잡스는 또다시 “추락한 영웅”이라는 언론의 조롱을 받았다. 그런 잡스가 어떻게 절망 속에서 일어나 할리우드의 거인으로 거듭났을까? 그에게는 ‘우주에 영향을 미치는 대단한 컴퓨터’를 만들었던 경험이 있었다. 별난 친구들을 발견하고 그들을 자극해서 편안한 현재를 넘어 도전하게 하는 재주가 있었다. 그리고 주변 사람을 자신의 열의에 빠져들게 하는 카리스마가 있었다. 이 모든 것이 이상적으로 결합해서 그는 새로운 과제를 찾을 수 있었다. 컴퓨터에 기반한 애니메이션 제작이 그것이었다.
컴퓨터 애니메이션에 관심을 돌린 잡스는, 정말 중요한 것은 하드웨어나 소프트웨어가 아니라, 사용자, 즉 관객의 경험이며, 그것은 바로 ‘콘텐츠’라는 것을 깨달았다. 잡스가 테크놀로지 세계를 넘어서 자신의 강점을 재발견했을 때, 잡스는 픽사(Pixar)를 하나의 문화 현상으로 만들었다.
그런 과정에서 그는 애플을 소생시키고 자신의 명성을 되찾을 수 있는 비밀을 발견했다.
디즈니의 애니메이터 존 래스터는 컴퓨터 애니메이션의 매력에 푹 빠져 있었지만 디즈니 거물들은 전통적인 2차원 캐릭터를 고수하고 있었다. 디즈니에 식상한 래스터는 조지 루커스 사단으로 옮겨 컴퓨터 그래픽 팀을 이끄는 앨비 레이와 에드 캣멀과 함께 일하게 되었다. 이때 루커스는 이혼 소송에 휘말려 현금이 부족해 당시 “밑 빠진 독”이었던 이 컴퓨터 그래픽 팀을 3,000만 달러에 내놓았다. 이 컴퓨터 그래픽 팀이 잡스에게 보여 준 선명한 그래픽 영상물은 잡스에게 또 하나의 제록스 PARC 충격이었다. 잡스의 눈에 이 컴퓨터 귀재들은 나날이 혁신을 향해 달려가고 있는데, 그 가치를 알아보지 못하는 조지 루커스가 이 소중한 팀을 팔려고 내놓은 것이다! 결국 잡스는 루커스의 그래픽 팀을 겨우 1,000만 달러에 사들이고 새로운 회사의 이름을 픽사(Pixar)로 명명했다. 픽사의 첫 작품 <럭소 주니어>를 본 사람들은 “이것이 컴퓨터 애니메이션의 모든 것이다.”라고 찬사를 아끼지 않았다.
하지만 여전히 자금 부족에 시달리던 잡스에게 픽사를 지원하는 일은 쉽지 않았다. 그러나 <양철 장난감>의 스토리보드에 감동한 잡스는 호주머니를 털어 자금을 내놓았고, 이것은 뒤에 디즈니가 픽사의 영화 제작을 지원하는 계기가 되었다. 자금난으로 시달리던 잡스는 넥스트의 규모를 반으로 줄이고 애니메이션 팀에도 압박을 가하며 힘겹게 버티고 있었다. 그러나 얼마 후 <양철 장난감>이 아카데미상을 받으면서 모든 상황을 바꾸어 놓았다.
7. 토이 스토리
1990년 9월 스티브는 넥스트스테이션(NeXTStation)이라는 새로운 컴퓨터를 내놓았다. 그는 이 신제품이 자신의 운명을 단숨에 되돌려 놓을 것이라고 믿었다. 컬러 화면을 자랑하는 이 제품의 디자인은 세계 최고 수준이라 해도 손색이 없었다. 그러나 디자인은 컴퓨터 판매의 충분 조건이 될 수 없다. 최고급 만년필은 파는데는 디자인만으로 충분할지 모른다. 그러나 컴퓨터는 그렇지 않았다. 더욱이 넥스트스테이션은 경쟁 제품에 비해 수천 달러가 더 비쌌다. 넥스트스테이션은 또다시 재앙이었다. 스티브는 더 이상 진실을 외면할 수 없었다. “신성 스티브 제국”은 무너지고 있었다. 잡스는 두 회사를 모두 닫고 사업을 그만둘 생각도 해보았다. 그러나 비즈니스를 빼면 그에게 남는 것은 아무 것도 없었다. 그것이 그의 운명이었다.
그 무렵 <양철 장난감>을 만든 래스터에게 반한 디즈니의 제프리 카첸버그가 픽사의 장편 3D 애니메이션에 자금․홍보․배급을 맡겠다는 제안을 해 왔다. 이 소식은 스티브에게 구세주와 다름없었다. 장편 애니메이션! 그것도 디즈니와 함께! 디즈니가 쏟아 부을 자금은 픽사의 윤활유가 될 것이 틀림없었다. 이제 스티브는 회사의 문을 닫는 수모를 겪지 않아도 되었다. 작업 도중에 제작 중단의 위기에까지 몰리는 등 수많은 우여곡절을 겪었지만 픽사는 마침내 최초의 3D 장편 애니메이션 <토이 스토리>를 완성해 냈다.
8. 아이콘
스티브 잡스의 사업 인생은 이제 두 개의 문을 마주하게 되었다. 하나는 어둠으로 통하는 문이었다. 넥스트의 거듭된 실패, <토이 스토리>가 망할 가능성, 공개적인 수모, 조용한 여생, 집에서 애나 보는 아빠? 또 다른 하나의 문은 밝은 햇살과 구름 한 점 없는 하늘로 통했다. <토이 스토리>가 대히트하고 픽사가 경이로운 회사라는 찬사를 받으며, 픽사 지분의 공개 상장으로 더 이상 돈 걱정 하지 않아도 되는 세상이 그곳에 있었다. 사업가로서 그의 인생은 이제 극에서 극으로 뒤바뀔 운명 앞에 놓였다. 다행히 그의 가정 생활은 안온했다. 남편이자 아버지인 스티브는 이제껏 사람들이 알던 스티브 잡스가 아니었다. 그는 가정에서 좀 더 평온하고 침착해졌고, 세상과는 더욱 평화롭게 지냈다.
1995년 11월 <토이 스토리>의 개봉을 앞두고 흥행 성적에 대해 온갖 추측이 난무했다. 시사회를 마치고 나자 <워싱턴 포스트>가 찬사를 쏟아내기 시작했다. “꼭 봐야 할 영화, 꼭 얘기해야 할 영화, 꼭 다시 찾을 영화.” 더 이상 바랄 게 없는 칭찬이었다. 이제 스티브 잡스는 하나의 아이콘이었다.
한편 애플은 1995년에 절망적인 상황에 놓였다. 고객들은 훨씬 성능이 향상된 마이크로소프트의 윈도를 운영체제로 선택한 최신형 IBM PC로 몰려갔고, 애플은 추락에 추락을 거듭했다. 애플은 IBM이 장악한 시장에서 더 이상 가격 경쟁력을 갖추기 힘들었다. 애플은 더 이상 가망이 없어 보였다. 애플 이사회는 존 스컬리의 뒤를 이어 애플을 이끌어왔던 마이클 스핀들러를 교체하기 위해 후보자를 물색했고 마침내 애플의 오랜 팬이자 물리학 박사이면서도 경영자로서 탁월한 능력을 보인 길 어밀리오를 새로운 CEO로 영입했다. 어밀리오는 뛰어난 경영자임은 입증했으나 반항아 기질이 다분한 애플의 문화에는 잘 적응하지 못했다. 이것은 물론 스티브 잡스가 만들어 낸 문화로 스티브를 제외하고는 애플의 CEO 그 누구도 제대로 통제하지 못했다. 애플의 상황을 지켜보던 스티브 잡스는 이제 다시 애플로 복귀해서 무너지기 직전의 회사를 구해내 자신의 존재를 세상에 알리겠다고 마음먹고 있었다.
어밀리오는 새로운 최신 운영체제의 도입이 애플의 시장 점유율을 끌어올릴 수 있는 핵심 요소라고 판단하고 운영체제를 보유한 회사를 물색했고 스티브와 협상 끝에 애플이 넥스트를 전격 인수하기로 마음을 먹었다. 그리고 어밀리오는 스티브를 애플의 ‘특별 고문’에 임명했다. 1997년 7월 여전히 매출 부진으로 고전을 면치 못하고 있던 애플의 이사회는 어밀리오를 퇴진시키고 결국 스티브를 CEO로 임명했다. 마침내 스티브는 자기가 세운 회사에서 쫓겨난 지 13년 만에 다시 제자리로 돌아왔다.
3부 미래를 잡아라
9. 영화계의 거물이 되다
수많은 불길한 예언들에도 불구하고 <토이 스토리>는 개봉 첫 주만에 제작비에 맞먹는 2,900만 달러의 흥행수입을 거둬들였고 그 해 최고의 흥행작이 되었다. 세계 전역에서 3억 5천만 달러 이상을 벌어들였고, 비디오 판권료로 1억 달러가 추가로 들어왔다. <토이 스토리>의 상상을 뛰어넘는 엄청난 성공으로 스티브는 할리우드의 거물이 되기에 충분했다. <토이 스토리>의 개봉 1주일만에 픽사의 주식 공개 상장이 이루어졌고, 종가가 39달러로 마감되었을 때 스티브는 다시 억만장자가 되어 있었다.
<토이 스토리>에 이어 1998년 연말에 개봉된 픽사의 두 번째 작품 <벅스 라이프> 역시 그해 최고의 흥행 애니메이션이 되어 <토이 스토리>의 성공이 요행수가 아니었음을 입증했다. 픽사의 주가는 63달러까지 치솟았고 73%의 지분을 소유한 스티브의 자산 가치는 14억 달러에 이르렀다. 그리고 이어서 제작된 <토이 스토리 2>는 속편이 성공하기 어렵다는 할리우드 불문율을 깨고 <벅스 라이프>의 기록을 깨뜨림으로써 픽사는 불과 몇 년 사이에 연달아서 대박을 세 번이나 터뜨린 셈이 되었다. 스티브 잡스는 이제 조지 루커스와 스티븐 스필버그와 동급이 된 것처럼 보였다. 그리고 2001년 개봉된 <몬스터 주식회사>는 처음 9일 만에 1억 달러의 흥행 기록을 돌파했다. 애니메이션 영화로는 가장 빠른 기록이었다. 영화는 애니메이션 부문 작품상을 비롯해서 세 가지 부문에서 아카데미상 후보에 올랐고 애니메이션 역사상 세 번째 흥행 기록을 세웠다. 또한 2003년 <니모를 찾아서>는 에니메이션 역사상 최대수입을 올리는 기록과 함께, 아카데미 애니메이션 작품상의 영광을 안겨주었다.
“픽사는 제2의 디즈니가 될 것이다.” 라고 외친 스티브의 말은 불과 몇 년 전만 해도 스티브 잡스다운 허풍과 공상으로만 비쳤을 말이다. 그러나 이젠 “제2의 디즈니”라는 말도 지나친 겸손의 표현이었다. 언론은 20억 달러의 수익을 돌파한 픽사에 대해 역사상 가장 성공한 할리우드 영화사라고 찬사를 보냈다.
10. 새로운 경지를 개척하다
스티브 잡스는 애플을 새롭게 부각시킬 만한 영역을 찾던 중 매킨토시에 인터넷 사용 기능을 강화하는 것이 최우선적인 과제임을 깨달았다. 폐허와 같던 애플의 실정을 조사하면서 소비자들 사이에 일고 있던 인터넷 물결을 타야 한다는 것을 감지한 것이다. 일찍이 애플은 간편한 사용법을 널리 선전해 왔다. 이 간편한 사용법을 인터넷과 결합시키는 것은 어렵지 않은 일이었다. 회사는 이제 새로운 소비자 컴퓨터를 만들어 내야 했다.
그러자 마술 같은 일이 벌어지기 시작했다. 애플은 회생의 계기와 소비자의 반응을 다시 붙잡았다. 이 모든 것이 산뜻한 색상의 1,300달러 짜리 컴퓨터 아이맥(iMac) 덕분이었다. 박스 안에는 인터넷 사용에 필요한 장치가 모두 갖춰져 있었다. 기판과 모뎀, 플러그뿐만 아니라 모니터까지 본체에 통합시킴으로써 모든 장치를 하나의 기구에 담아 낸 말 그대로 소비자 지향의 컴퓨터였다. 오랫동안 “플러그 앤 플레이(plug and play)”는 애플의 전투 구호나 마찬가지였다. 그것이 새 시대에 맞게 응용된 것이다. 이제 소비자는 케이스를 열고 컴퓨터를 꺼내 플러그를 꽂으면 곧바로 웹 서핑을 즐길 수 있게 되었다. 아이맥은 매킨토시의 장점만을 살려서 새로운 시대에 맞게 응용한 제품이다. 그러나 스티브의 오랜 고집도 여전했다. 아이맥에는 플로피 디스크 드라이브가 없다. 대신 기능이 훨씬 뛰어난 CD롬 드라이브를 장착했다. 이 문제로 그는 극심한 비난을 들어야 했지만 이번에는 그가 110% 옳았다. 플로피 디스크는 이제 시대착오적인 물건이 되었다.
애플은 컴퓨터 사업을 확장해서 디지털 음악이나 사진 부문까지 진출할 계획을 세웠다. 스티브는 그것을 애플의 새로운 ‘디지털 허브’라고 불렀다. 비틀즈의 광적인 팬이었던 그가 마침내 내놓은 것은 ‘아이튠(iTunes)’이었다. 그것은 애플을 음악 산업에 진출시키려는 스티브의 과감한 노력이 낳은 결과물이었다. 이제 매킨토시 사용자들은 아이튠을 이용해서 음악 CD를 컴퓨터로 복사할 수 있었고 언제든 원하는 곡을 재생할 수 있었다. 또한 인터넷에서 MP3 음악 파일을 다운로드할 수 있었다. 초기에는 오로지 맥 사용자들에게만 허용된 특권이었다. 2001년 맥월드 엑스포에서 스티브는 청중들에게 외쳤다. “우리는 아이튠의 간편한 사용법이 더 많은 사람들을 디지털 음악 혁명에 끌어들일 수 있기를 기대하고 있습니다.” 애플은 아이튠을 가지고 혁명에 동참했다. 그것은 애플 제품군과 호환되는 인터넷 서비스의 개시였으며, ‘요람에서 무덤까지 애플과 함께’라는 스티브의 비전을 구체화한 또 다른 시작이었다. 그러나 잡스는 단지 혁명에 동참한 것이 아니었다. 그는 세상을 바꾸고 있었다.
11. 아이포드, 아이튠, 데어포 아이앰 iPod, iTunes, Therefore I am
어느 날 하이테크 산업의 젊은 뜨내기 컨설턴트가 휴대용 음악 재생기(MP3)에 대한 기본 아이디어를 갖고 애플을 찾아왔다.
이것이 아이포드(iPod)의 탄생의 시작이었다. 스티브는 디자인을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자칭 “예술가”이며, 동시에 첨단 기술을 가장 손쉽게 작동하도록 만드는 것이 애플의 정신이다. 아이포드는 이러한 잡스의 감각과 애플의 목표가 잘 결합된 작품이다. 2001년 10월 애플이 세상에 내놓은 아이포드는 애플 역사상 가장 성공한 제품이다. 아이포드를 출시하며 스티브는 말했다. “이제 아이포드가 나온 이상 음악을 듣는 일은 예전과는 절대로 같을 수 없습니다.” 이것은 스티브 자신이 상상했던 것보다 훨씬 더 정확한 진실이 되었다.
애플의 세 번째 음악사업은 아이튠 뮤직스토어였다. 아이튠 뮤직스토어는 소니, 워너 등 대형음반사와 정식 계약을 체결함으로써 음반업계의 축복 속에 탄생한 최초의 인터넷 음악 공급업체다. 스티브는 디지털 음악 공급이 음악의 판매와 배급 방식을 영구히 변화시킬 것으로 확신하고 있었다.
이번에도 그는 미래의 맥을 정확하게 짚어냈다. 아이튠 뮤직스토어는 순식간에 합법적인 음악 다운로드 시장의 70퍼센트를 차지했다. 1년 만에 무려 8,500만 곡의 판매 실적을 올렸고, <포춘> 선정 “2003년 히트 상품”에 뽑혔다. 음악 산업에 진출한 스티브 잡스는 미국에서 가장 텃새가 심한 영역에서 엄청난 성취를 이루었다. 음악 산업의 특성을 바꿔 놓았고 그 분야를 자신의 의지에 굴복시켰다.
12. 거인들의 싸움
한 동안 긴밀한 제휴 관계를 유지해왔던 픽사와 권위주의적인 마이클 아이스너가 이끄는 디즈니는 자주 충돌했고 결국 언젠가는 부딪쳐야 할 운명이었다. 마침내 픽사는 디즈니와의 결별한 후 첫 작품으로 <인크레더블>을 제작했다. 이것은 그야말로 픽사의 운명이 걸린 작품이었다. 주말에 개봉된 <인크레더블>은 주말 흥행기록사상 최대의 실적을 올렸다. <인크레더블>의 성공으로 스티브는 중요한 전투에서 승리했다. 이제 픽사는 디즈니 없이도 영화를 제작할 수 있게 되었고 마이클 아이스너는 로이 디즈니와의 갈등을 이기지 못하고 결국 디즈니에서 물러나고 말았다. 그러나 거인들의 충돌에서 양측은 모두 승리자이면서 패배자였다. 디즈니는 막대한 이익을 놓쳤고 픽사는 역사상 최고의 마케팅 파트너를 잃었다. 그러나 이제 스티브는 모두가 인정하는 영화계의 거물이 되었다.
아무리 엄청난 부와 명예도 보통사람에게 찾아오는 병마를 막아주지는 못한다. 2004년 8월 1일 일요일 스티브 잡스는 가족과 지인, 직원들에게 이메일을 보냈다.
“여러분과 공유하고 싶은 개인적인 소식이 있습니다. 지난 주말에 저는 췌장에서 종양을 떼어내는 수술을 성공리에 마쳤습니다. 이 종류의 종양은 조기에 발견하면(제 경우가 그렇습니다만) 외과 수술로 쉽게 제거할 수 있습니다. (…) 8월 한 달 동안 회복기간을 갖고 9월에는 업무에 복귀할 겁니다. (…) 9월에 여러분을 다시 만날 것을 고대합니다.”
스티브가 그처럼 일찍 복귀하려고 했던 이유는 몇 달만에 밝혀졌다. 애플은 아이포드의 성공을 잇는 신제품 개발에 나서면서 다시 잡스의 거창한 꿈을 맹렬히 좇기 시작했다. 그것은 빌 게이츠에게서 다시 컴퓨터 산업을 다시 찾아오려는 꿈이었다.
13. 쇼타임
2005년이 시작될 때 스티브 잡스는 세상 꼭대기에 올라 있었다. 아이포드의 판매 실적은 이미 기대치를 웃돌았고, 췌장암도 깨끗이 물리쳤다. <인크레더블>은 막대한 흥행 성공을 거두었을 뿐 아니라 애니메이션 부문의 아카데미 작품상을 받았다. 잡스는 이제 겸손함의 미덕까지 갖춰서 그 해 시상식에서는 작가 겸 감독 브래드 버드에게 무대에 올라 스포트라이트를 받는 역할을 양보하기까지 했다. 그의 명성은 절정에 올라 있었다. 스티브 잡스는 완벽하게 부활했다. 아니, 예전보다 더욱 훌륭한 모습으로 돌아왔다.
매킨토시를 처음으로 소개한 지 21년이 지난 2005년 1월 11일 맥월드 엑스포에서 스티브는 그간 개발한 신제품들을 소개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프리젠테이션을 시작한 지 82분만에 그 날 행사의 가장 중요한 제품을 선보였다. 키보드도 마우스도 모니터도 없는 조그만 컴퓨터, 맥 미니(Mac Mini)였다. 관객은 맥미니에 완전히 사로잡혔다. 잡스가 가격을 499달러에서 599달러 정도로 책정할 예정이라고 발표하자 장내가 떠나갈 듯한 박수가 터져 나왔다. “애플 역사상 가장 값싸고 부담 없는 매킨토시입니다.” 그것은 마이크로소프트와 인텔이 지배하는 세계에 대한 강력한 도전장이었다.
스티브 잡스는 쉰 살의 나이에 세 가지 산업에서 아이콘이 되었다. 하지만 지금도 그는 이제 막 시작한 사람처럼 행동하곤 한다. 그의 근본적인 기질은 변하지 않았다. 공격적이고 독단적인 태도가 여전했고 거의 불가능한 과제를 달성하기 위해 주변 사람들을 밀어붙이는 태도 역시 그대로 남아 있었다. 하지만 그는 이제 중년이 되었다. 아이가 셋이나 되고 산전수전을 겪은 중년의 나이에 도달해 있었다. 좀더 따뜻한 사람, 좀 더 부유한 사람, 좀 더 용서하고 이해할 줄 아는 사람이 되어 있었다. 그럼에도 그는 여전히 예전 그대로의 스티브 잡스였다. 참을성은 우리가 스티브 잡스에게 기대할 만한 태도는 아닐 것이다. 숭배자들, 투자자들, 음악 애호가들, 영화 관객들, 그리고 새로운 디지털 세대는 모두 잡스가 다음 번엔 어떤 세계를 정복할지를 참을성 있게 기다려 주지 않을 사람들이다. 그 점에서는 잡스 역시 마찬가지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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