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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RD(교육)/1.경영도서요약

힐링 소사이어티

인사노무 전문가 2020. 4. 24. 13: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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힐링 소사이어티

- 깨달음만이 희망이다 -

 

 

1장 깨달음의 혁명

 

진짜 나 를 알면 삶이 보인다

선가(禪家)에서는 하늘과 같이 청정한 마음을 찾아가는 과정을 농부가 소를 길들이며 몰고 가는 과정에 비유한다. 이때 농부가 몰고 가는 소는 우리의 욕망과 감정, 즉 에고를 상징한다. 그리고 농부는 우리의 참자아를 의미한다.

 

처음에 우리는 소를 자신의 자아라고 착각한다. 이런 단계에 머물러 있는 인간은 먹고 싶을 때 먹고, 잠자고 싶어지면 자고, 욕정이 생기면 섹스를 하는 동물과 아무런 차이가 없는 존재이다. 에고의 욕구가 채워지면 행복하고, 채워지지 않으면 불행할 뿐이다.

 

한편, 농부는 소를 길들이기 위해 코에 코뚜레를 꿴다. 이때 소는 매우 고통스러워 하며 농부의 지시에 따르게 된다. 농부는 고삐를 당기면서 소가 다녀서는 안 되는 길과 다닐 수 있는 길을 가르친다. 이런 단계를 거치면 소는 농부의 고삐에 의해 길들여져 농부가 피리만 불어도 자기가 가야 할 곳을 스스로 알아서 찾아간다. 드디어 우리의 에고가 우리의 참자아를 인식한 것이다. 이 단계에 이르면 이제 소의 자아는 사라지게 되고 오직 농부만 있을 뿐이다. 탐욕과 욕망은 사라지고 당신의 진정한 자아만이 홀로 서 있게 된다.

 

우리는 영혼에 대해서 많은 이야기를 들어 왔다. 인간이라면 누구나 영혼이 있다. 이 글을 읽는 당신의 가슴속에도 순수하며 생명력이 충만한 영혼이 깃들어 있다. 사람을 죽인 살인자조차도 불치의 병에 걸려 죽어 가는 어린아이를 보면 측은함을 느낀다. 그의 내면 깊은 곳에 순수함과 사랑이라는 보석이 숨어 있기 때문이다.

 

지금 당장은 여러 가지 잡다한 일 때문에 자신의 영혼이 들려주는 목소리를 듣지 못할 수도 있다. 영혼이 비명을 지르고 있어도 당신의 영혼 위에는 온갖 잡념과 감정들, 관념이라는 두터운 먼지와 쓰레기들이 쌓여 있어 영혼의 목소리가 바깥으로 뚫고 나오는 것을 방해하고 있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이 쓰레기와 먼지를 치울 수 있을까? 가능한 자주, 낮과 밤을 가리지 않고 열심히 쓸고 닦는 수밖에 없다. 당신의 영혼을 뒤덮은 먼지를 너무 오랫동안 방치한다면 그 먼지는 점점 굳어져 당신이 원하든 원치 않든 당신의 일부가 되고 살이 될 것이기 때문이다.

 

당신은 몸과 마음 어느 쪽의 노예가 되어서는 안 된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몸이 곧 자신이라는 잘못된 믿음으로 살아간다. 우리는 자신의 외모, 능력, 사회적 지위, 혹은 생각이나 감정, 감각들을 자기라고 믿는다. 그러나 진정한 당신의 본질은 그런 유한하고 제한된 것들이 아니다. 당신 몸은 당신의 것이기는 하지만 당신이 아니다. 만약 당신이 자신의 몸뚱이를 나라고 생각한다면 죽을 때까지 그 몸을 만족시키는 것에만 급급한 삶을 살게 될 것이다. 그것은 몸의 노예가 되는 삶과 다를 바 없다.

 

마음의 경우는 훨씬 더 심각하고 해로운 영향을 미친다. 당신의 인격, 지식, 감정, 생각... 이 모든 것은 진짜 당신이 아니다. 당신은 야구경기를 즐기고, 컴퓨터 오락프로그램에 열광하는 다혈질의 남성이 아니다. 당신은 인내심 있고 고상한 취미를 가진 여성도 아니다. 당신은 그보다 훨씬 크고 무한한 존재이다. 당신의 참된 자아는 우주만큼 넓고 크며 영원하다.

 

당신에게는 몸과 마음보다 더 높은 차원의 신성이라는 존재가 있다. 그것이 바로 당신의 참된 자아이다. 참자아의 존재에 눈을 뜬 사람은 제일 먼저 자신을 둘러싼 모든 것에 감사하게 된다. 매일 아침 눈을 뜨고, 숨을 들이마시고 내쉬는 일에도 감사함을 느낀다. 자신에게 주어진 모든 것에 대한 감사는 당신을 더욱 열정적이고 성실하게 만들 것이다. 그러면서 당신은 조화로운 사람이 되어 간다. 항상 남을 배려하는 습관이 몸에 배고, 남들이 꺼리는 힘든 일일지라도 기꺼이 먼저 나서고, 너그러이 타인을 용서할 수 있게 된다.

 

사랑이 없는 깨달음은 가짜다

깨달음이란 무엇인가? 깨달음은 참자아를 발견하고, 참자아를 당신의 주인으로 맞이하여, 참자아가 당신을 통해 일하도록 하는 것이다. 그런데 깨닫기 위해서는 먼저 간절히 깨달음을 원하는 마음이 필요하다. 그리고 깨달음이 찾아오는 순간을 포착하기 위해서 항상 마음의 눈과 귀를 열어두어야 한다.

 

발이 쑤시듯 아플 때 통증의 원인은 여러 가지가 있을 수 있다. 당신은 의사를 찾아가 통증의 원인을 알아낼 것이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통증이 사라지는 것은 아니며 발은 여전히 쑤시고 아플 것이다. 그러면 어떻게 하겠는가? 약을 먹거나 바르며 상처부위가 감염되지 않도록 조심할 것이다. 단 한번만? 물론 아닐 것이다. 당신은 통증의 원인이 사라질 때까지 계속 치료하며 조심할 것이다.

 

깨달음에 이르는 길도 마찬가지이다. 당신이 깨달음에 이르는 방법을 안다고 해서 깨달음에 도달하는 것은 아니다. 지속적인 탐구와 훈련이 필요하다. 나는 왜 태어났는가? 나는 어디에서 왔으며, 어디로 가고 있는가? 이런 질문들은 절대 쉽게 사라지지 않는 통증처럼 수천 년 동안 인간을 괴롭혀 왔다. 이 질문에 대한 답을 구했을 때가 바로 깨달음에 이르는 순간이다.

 

당신이 진정 깨달음을 원한다면 단순해질 필요가 있다. 마음에 복잡한 생각을 쌓아둔 사람은 영적인 각성의 순간을 경험할 수 없다. 이것은 마구 휘저어 놓은 진흙탕 속에서 작은 바늘 하나를 찾으려는 것과 같다. 당신이 그 흙탕물 속에 손을 넣고 샅샅이 더듬는다 해도 바늘을 찾을 수는 없다. 당신은 진흙이 바닥에 모두 가라앉아 맑은 물이 보일 때까지 기다려야 한다.

 

인류 역사를 통틀어 깨달음에 이른 사람은 많다. 예수와 부처, 마호메트, 이름을 남기지 않은 수천 명의 성인과 현인들, 그리고 선견지명이 있는 예언자들 모두가 우리는 하나라는 진리를 깨달은 사람들이다. 그들은 육체적 삶 속에 있는 모든 것이 허상이며, 자신의 참된 자아는 더 높은 차원에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하지만 그들 중 대부분이 세상에서 떨어져 은둔하며 살다가 삶을 마감했다. 이것이 그들이 실패했던 이유이다. 그들은 사랑을 실천에 옮기지 못했다.

 

몇 년 전 나는 네팔을 여행한 적이 있다. 그때 우연히 라마 불교의 한 종단에서 열린 환생법왕 즉위식을 보게 되었다. 세 살 박이 사내아이가 환생한 라마라면서 살아 있는 부처 리에 오르는 의식이었다. 그 아이는 몇 시간씩 계속되는 의식에 시달리면서 계속 콧물을 흘리고 재채기를 했다. 승려 두 명이 양옆에 서서 아이가 움직이지 못하도록 꼭 붙잡고 있었다. 아이는 연신 승려들이 씌워주는 무거운 왕관을 벗어 던졌고, 승려들은 그 왕관을 다시 얹기를 반복했다.

 

저 아이가 안됐습니다. 저렇게 어린 나이에 부모와 떨어져서 낯선 사람들만 가득한 장소에 억지로 붙들려 있다는 생각이 드는군요. 내 말에 나를 안내했던 사람이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그에게 물었다. 네팔에는 깨달은 사람도 많다고 들었습니다. 하지만 이 나라의 영아 사망률은 50%가 넘고, 거리에는 남에게 동정을 받아 구걸을 보다 쉽게 하기 위하여 스스로 다리를 잘라낸 사람들로 가득합니다. 이런 현실의 궁핍함과 절망을 무시하는 깨달음이 무슨 소용이 있습니까?

 

현실의 문제가 무엇인지 간과하는 깨달음은 진짜 깨달음이 아니다. 현실에 발을 딛고 사회에 실제적인 도움을 줄 수 있는 것만이 진정한 깨달음으로 인정받아야 한다. 너무나 많은 사람들이 용기와 진정한 사랑이 결핍된 깨달음을 추구하고 있다. 이는 정말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 없다.

 

 

2 장 나는 누구인가?

 

왜 깨달아야 하는가?

배고픈 두 사람이 하얀 쌀밥 한 공기를 앞에 두고 앉아 있다. 한 사람은 아주 급하게 먹고, 다른 한 사람은 맨 위에서부터 차근차근 먹고 있다.

 

그러다가, 두 사람 사이에 먹는 방법을 놓고 언쟁이 벌어졌다. 첫 번째 사람은 어차피 몇 분이면 다 먹게 될 밥을 어떻게 먹느냐가 뭐 그리 중요하냐고 말한다. 두 번째 사람은 밥을 먹을 때조차도 지켜야 할 양식이 있다고 강조한다. 시간이 지나면서 언쟁은 점점 뜨거워진다.

첫 번째 사람은 두 번째 사람을 향해 지나치게 자제하고 조절하려 든다고 비난한다.

두 번째 사람은 첫 번째 사람에게 지나치게 서두르면서 식탐을 한다고 맞선다. 결국 언쟁은 주먹싸움으로 변하고 만다. 그리고 주먹이 오가는 사이 식탁에 있던 밥그릇이 바닥으로 굴러 떨어져 밥은 엎질러지고 결국 두 사람 다 밥을 먹을 수 없게 되고 만다.

 

왜 이런 일이 생겼는가? 두 사람 다 무엇이 중요한 지를 잊어버린 결과이다. 먹는 방법이 문제가 아니라 실제로 밥을 먹고 배고픔을 해소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사실을 생각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이들은 서로가 옳다는 것을 증명하기에만 급급하여 결국 두 사람 다 밥을 굶고 말았다. 그렇다면 이 두 사람이 똑같이 밥을 나눠 먹고 허기를 함께 달랠 수는 없었을까? 한 사람을 만족시키기 위해서는 다른 사람이 굶는 방법밖에 없는 것일까? 이것이 적자생존인가?

 

우리는 아직도 쌀밥 한 공기를 나눠먹는 현명한 방법을 찾지 못했다. 여전히 인류 역사가 시작된 이래 끊임없이 우리를 부추겨온 경쟁이라는 패러다임 속에 틀어박혀 있다. 우리는 자기의 가치를 실현할 수 있는 길이 경쟁뿐이라고 착각하고 있다. 그래서 어떤 대가를 치르더라도 승자가 되기를 원한다. 이런 패러다임 속에서는 나 아닌 다른 사람들은 전혀 중요하지 않다.

 

모든 사람에게는 세 가지 본능적인 욕구가 있다. 안전을 보장받으려는 욕구, 인정받고 싶은 욕구, 그리고 다른 사람을 지배하거나 조절하려는 욕구이다. 누구나 세 가지 욕구가 만족되느냐 아니냐에 따라 매일같이 슬퍼하기도 하고 기뻐하기도 한다. 당신은 어떤 일에 기뻐하고 슬퍼하는가? 자신의 의식깊은 곳을 들여다 보라. 당신이 느꼈던 감정과 행동은 모두 이 세 가지 욕구에서 비롯되었음을 인정하게 될 것이다.

 

하지만 사람에게는 이 세 가지 욕구 너머에 한 가지 욕구가 더 있다. 이것이야말로 우리를 가장 인간답게 하고 성스러운 존재로 만들어주는 욕구이다. 이 욕구는 물질적 차원이 아니라 우리의 영적인 근원에서 나온다. 영혼 깊은 곳에서 솟아나는 이 갈망은 본능보다도 더 깊숙한 곳에 숨어 있다. 그 욕구는 바로 조화와 사랑에 뿌리를 두고 다른 이들과 하나로 연결되고자 하는 소망이다.

 

진정으로 행복하고 아름다운 사회는 경쟁을 통해서 자신의 가치를 평가받는 사회가 아니라, 조화와 화합을 통해서 가치를 창조하고 실현하는 사회이다. 이런 사회를 만들기 위해 절대적으로 필요한 것이 영적인 혁명이다. 현재 우리 삶의 가치를 판단하는 기준을 오감에서 영적인 감각으로 전환해야 한다. 그것만이 지금까지 우리를 지배해 왔던 경쟁적인 패러다임에서 조화와 상생의 패러다임으로 전환할 수 있는 방법이다. 우리가 깨달음의 혁명 을 일으켜야 하는 이유는 바로 여기에 있다.

 

정보의 질과 양이 당신의 가치를 결정한다

우리가 흡수하는 정보는 세 가지 범주로 나눌 수 있다. 유전적인 정보, 지식 정보, 그리고 경험에 의한 정보이다. 유전적인 정보는 아버지의 정자와 어머니의 난자로부터 전해진다. 지식 정보는 외부세계의 자원들 - 책과 교육, 영화와 텔레비전, 다양한 대중매체 등을 통해서 알게 된다. 정보의 형태로 보면 간접적인 정보이다. 경험적인 정보는 개인적인 체험을 통해서 흡수한 정보이며 직접적인 정보에 속한다.

 

우리는 정보의 집합체이면서 동시에 정보의 주인이다. 하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이 자신을 구성하는 다양한 정보들을 변화시킬 권리와 능력이 자신에게 있다는 사실을 깨닫지 못한다. 그저 무의식적으로 흘러 들어오는 정보들을 별다른 의문이나 불평 없이 수동적으로 받아들일 뿐이다. 그리고 이렇게 받아들인 다양한 정보들이 실제의 자기라고 생각한다.

 

벼룩 한 마리를 잡아 유리병 속에 집어넣고 뚜껑을 닫아 보자. 벼룩은 몇 분 동안은 유리병 속에서 펄쩍펄쩍 뛰어오르지만 뚜껑에 몇 번 부딪히고 나면 나중에는 더 이상 뛰지 않는다. 그리고 시간이 지나면 뚜껑을 열어 놓아도 더 이상 뛰어오르지 않고 유리병 속에 안주한다.

 

우리 인간에게는 아예 이런 유리 뚜껑 같은 것이 없다. 우리의 한계는 오직 저 위에 뚜껑이 있다 라는 거짓 정보에서 시작될 뿐이다. 스스로를 유리병 속에 갇혀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그 상상의 뚜껑을 치울 생각도 못하고 바깥으로 나가 자유를 누릴 수 있는 선택권을 스스로 포기하고 마는 것이다. 우리에게는 상상의 뚜껑을 치워버리고 자유를 선택할 권리가 있다. 오직 선택하기만 하면 된다.

 

사람은 누구나 뇌를 가지고 있지만, 이 뇌를 활용하는 법을 제대로 아는 사람은 극히 드물다. 뇌는 모든 컴퓨터의 아버지이다. 슈퍼컴퓨터도 인간의 뇌가 만들어낸 것이며 언어와 종교, 문화, 역사, 법률을 포함해 현대문명의 모든 것을 창조해낸 것도 뇌이다. 인류는 뇌를 이용해 꿈을 실현해 왔다. 따라서 창조의 원천인 인간의 뇌를 알게 된다면 곧 인간 존재의 비밀을 알게 된다.

 

뇌를 아는 것이 나를 아는 것이다

뇌를 자신의 의도대로 활용하려면 우선 뇌에 대한 기본 지식을 알아두어야 한다. 복잡하게 얽힌 뇌구조를 상세하게 공부할 필요는 없지만 기본적으로 뇌가 크게 세 부분으로 나누어진다는 정도는 알고 있어야 한다. 뇌의 제일 바깥에 있는 층은 신피질이고 중간층은 구피질이다. 그리고 가장 안쪽에 위치한 층이 뇌간이다.

 

신피질은 인간의 기본적인 본능을 제어하는 이성의 능력이 있다. 구피질은 감정과 욕구의 영역을 다스린다. 식욕과 성욕, 기쁨, 분노, 슬픔과 사랑 등의 다양한 감정들이 일어나는 곳이 구피질이다.

 

한 어린아이가 과일 가게 앞을 지나가다가 탐스럽게 생긴 사과를 보았을 때 구피질은 사과를 집어먹으라고 지시한다. 그러나 강력하게 이성을 관장하는 신피질은 주머니 속에 돈이 얼마나 있는지 먼저 확인하라고 지시한다. 지금은 저 사과를 살 만큼 돈이 없으니까 당장은 먹을 수 없어. 하면서 신피질의 요구대로 행동하면, 구피질은 당장 사과를 먹지 못하는 사실에 대해 불평한다. 하지만 이내 신피질은 집에 가서 엄마에게 사과 살 돈을 달라고 해야지. 사과는 조금 있다 사 먹으면 돼. 라는 결론을 내려준다.

 

이런 식으로 신피질은 구피질의 본능적인 욕구를 조절한다. 구피질의 욕구와 신피질의 조절 능력이 서로 균형을 유지할 때 우리의 몸과 마음은 조화롭다. 만약 신피질이 너무 빡빡하게 조절을 하려 들면, 구피질은 분노와 스트레스, 그 밖의 다른 감정을 통해 자신의 욕구불만을 해소하려 한다.

 

뇌간은 소화, 호흡, 순환 등 인체의 생명유지를 위한 기본 기능을 관장하는 자율신경조직을 책임진다. 뇌간은 끊임없이 심장을 박동하게 만들고, 한순간도 쉬지 않고 폐를 확대 수축하도록 움직이며, 우리가 살아 숨쉬게 한다. 만약 이 뇌간이 쉬겠다고 작정을 하면 무슨 일이 벌어질까? 그러나 다행스럽게도 뇌간은 절대 쉬지 않는다. 뇌간은 어떤 대가도 바라지 않고 그저 묵묵히 인체의 효율적인 신진대사에 충실할 뿐이다.

 

신피질은 현재 알려진 바로는 시간, 공간, 냄새, , 온도 등 52가지 항목에 대한 판단 기능을 가지고 있다. 이 모든 항목에 대해서 신피질에서 예 라는 판단을 내린 정보, 0 .01%의 의심도 없는 100%확신을 얻은 정보만이 뇌간에서 받아들여진다. 하지만 신피질의 판단 기능이 멈춘 깊은 최면 상태에서는 주어진 암시를 그대로 뇌간까지 전달할 수 있다. 마취주사 대신 최면을 이용해서 수술을 집도한 사례가 화제가 되기도 했는데 이것도 그러한 원리이다.

 

뇌간에 잠재된 능력을 끌어낼 수만 있다면 초인적인 힘이나 기적적인 치유를 경험할 수도 있다. 반신불수로 움직이지 못하고 누워 있는 환자일지라도 큰불이 나서 당장 뛰쳐나와야 할 다급한 상황에서는 벌떡 일어나 몸을 피하게 된다. 생사가 걸린 위급한 상황에서 순간적으로 신피질의 이성적인 판단이 멈추고 당장 병실 밖으로 나가야 한다는 정보가 바로 뇌간으로 전달되기 때문이다.

 

오늘날 우리는 이러한 뇌간의 신적인 능력과 만나는 법을 잊은 채 살아가고 있다. 뇌간과 만날 수만 있다면 엄청난 잠재력을 활용할 수 있다. 이렇게 엄청난 힘을 지닌 뇌간을 개개인의 의식의 성장을 위해 그리고 인류의 더 나은 미래를 위해 쓸 수 있다면 인류 전체의식에 비약적인 진보를 가져오게 될 것이다.

 

 

3장 우리는 어디로 가야 하는가?

 

우리의 고향 마고성 이야기

신라시대 박제상이 썼다고 전해지는 부도지는 우리 민족의 가장 오래된 사서이다. 부도지는 천지창조의 주인공을 율려라고 말하고 있다. 율려가 몇 번 부활하여 별들이 나타났고, 그 별들은 끝없는 순환을 거듭하면서 우주의 어머니인 마고를 잉태했으며 마고성을 창조해내었다.

 

이 책에서도 말하고 있듯이 율려는 창조주의 의지가 직접적으로 드러난 것이다. 창조주는 율려를 통해 세상만물을 창조했다. 또한 율려는 모든 생명을 관통하는 세 가지 요소 - 빛과 소리와 진동으로 가득차 있다. 부도지에 따르면 우리 인간도 율려로 만들어졌다.

 

그렇다면 율려가 창조해냈다는 마고성은 무엇일까? 마고성은 깨달음에 이른 사람들이 조화를 이루며 살았던 근원적인 세상의 모습이며, 우리가 가장 깊은 영적 단계에 올라간 후에 반드시 돌아가야 할 세상이다. 마고성의 사람들은 지유를 마시며 완전한 조화 속에서 살고 있었다. 그들은 품성이 조화롭고 따뜻했으며 순수하고 맑았다. 이들의 에너지는 하늘과 땅과 하나였기 때문에 유한한 육체의 한계를 넘어 모두가 장수를 누렸다.

 

그런데 사람들의 숫자가 늘어나면서 지유가 부족해졌고 지유를 먹기 위해 기다려야 하는 일이 생겼다. 무리 중에는 배고픔을 느끼는 사람도 있었다. 그중 한 명이 어느 날 우연히 포도를 먹고 큰 변화를 겪게 되었다. 포도를 먹기 시작하면서 그들은 절대적인 합일의 세상을 잃어버렸다. 그들은 너와 내가 서로 다르다고 생각하게 되었고 세상만물을 판단하고 분별하는 능력에 눈을 뜨게 되었다.

 

이들은 하나로 연결되어 있던 자신의 몸과 마음과 영혼을 서로 분리시켜 생각하기 시작했다. 그리하여 율려와 직접 소통하는 능력을 잃어버렸고 다른 존재와의 일체감도 놓치게 되었다. 마고성의 질서와 조화는 문란해지고 마고성의 존립마저 위험에 처했다. 결국 마고성의 사람들은 마고성을 떠나기로 결정했다. 이렇게 불완전한 상태로 마고성에 계속 머무를 수는 없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그들은 성바깥으로 나가 언젠가는 다시 마고성으로 돌아오겠다는 맹세를 하고 각자 동서남북으로 길을 떠났다.

 

마고성 이야기는 성경의 창세기나 다른 민족의 창세신화와 유사한 점이 많다. 이는 우리 인간이 공통의 뿌리를 가지고 있으며 근원으로 돌아가고자 하는 깊은 영적 충동을 지니고 있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마고성이 상징하는 근원으로 돌아가기 위해서는 잃어버린 합일의 느낌과 조화를 회복해야만 한다. 그것은 오직 깨달음을 통해서만 회복할 수 있는 감각이다.

 

뉴휴먼 , 당신은 이 혁명을 일으킬 첫 불꽃이다

깨달음의 혁명이라는 대장정에 불을 지피기 위해서는 뉴휴먼 공동체를 만들어내야 한다. 뉴휴먼이란 무엇인가? 뉴휴먼은 자기 안의 율려를 만난 사람이며 자기 안의 창조주를 만난 사람이다. 율려와의 만남을 통해 우리는 자신이 누구인지, 삶의 목적이 무엇인지에 대한 참다운 자각을 얻을 수 있다.

 

그렇다면 뉴휴먼이 갖추어야 할 다섯 가지 조건으로는 어떤 것이 있는지 살펴보자.

 

첫째, 뉴휴먼은 건강한 사람이다. 그러나 뉴휴먼이 갖추어야 할 건강함이란 자기 몸의 기능과 에너지를 자기가 의도한 대로 100% 활용할 수 있는 상태 를 말한다. 이것이 바로 내 몸은 내가 아니라 내 것이다 라는 말의 핵심이다. 건강한 사람은 자기 몸의 진정한 주인 노릇을 하는 사람이다.

 

둘째, 뉴휴먼은 양심적인 사람이다. 문화적 차이와 시대적 상황에 따라 옳고 그름을 판단하는 기준은 달라질 수 있지만 정직하고 양심적으로 살겠다는 의지는 영원하며 모든 시대와 문화를 관통하는 중요한 가치이다. 양심은 우리 내면에 있는 신성의 목소리를 듣는 것이다.

 

셋째, 뉴휴먼은 지성이 있는 사람이다. 지성은 복잡하고 어려운 정보를 많이 아는 능력이 아니라 밝고 건강하며 다른 사람에게 도움이 되는 실질적인 정보를 생산해내는 능력이다. 아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지성은 아는 것을 넘어서 문제를 해결하는 능력이다. 그러므로 이러한 지성을 갖추기 위해서는 깊은 통찰력 못지 않게 확고한 실천력이 뒤따라야 한다.

 

넷째, 뉴휴먼은 정서적인 사람이다. 풍부한 감성을 통해 멋과 풍류를 아는 사람이다. 이 말은 파도치 듯 심한 감정의 기복을 즐기라는 뜻이 아니다. 그렇다고 감정의 변화를 피해 황무지처럼 메마른 가슴이 되라는 말도 아니다. 존재의 아름다움과 조화로움의 중요성을 느끼라는 말이다.

 

다섯째, 뉴휴먼은 신령스러운 사람이다. 신령스러움은 우리의 에너지와 우주의 에너지가 하나로 연결되었을 때 찾아온다. 흔히 영감을 받았다고 할 때가 바로 우주의 에너지와 맞닿는 신성한 순간이다. 우주만물은 이 신성한 에너지로 가득 차 있다. 뉴휴먼은 우리 뇌 속에 입력된 수많은 정보들을 내면의 신성이라는 여과기로 걸러낼 줄 아는 사람이다.

 

이처럼 뉴휴먼은 깨달음을 습관으로 만든 사람이며 자신의 영적인 건강을 유지하기 위해 끊임없이 훈련하는 사람이다. 10년 안에 인류가 깨달음의 혁명으로 도약하기 위해서는 1억 명의 뉴휴먼이 필요하다. 그리고 당신은 그 혁명을 일으키는 첫 불꽃이 될 사람이다!

 

 

4 장 미래를 위한 선택과 결심

 

깨달음의 추구 에서 깨달음의 실천으로

인류가 안고 있는 심각한 문제들을 해결하려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사람들이 이런 질문을 던질 때마다 나는 이렇게 말한다. 어려울 것 없습니다. 잘 놀기만 하면 됩니다. 현재 우리는 자기 자신과 잘 놀지 못합니다. 당연히 다른 사람들과도 잘 놀지 못합니다. 또 우리는 다른 단체와 잘 놀지 못하며 국가와 국가간에도 잘 놀지 못합니다. 심지어 우리는 자연과도 잘 놀지 못합니다.

 

왜 이렇게 되었을까? 우리가 잘 노는 방법을 한 번도 제대로 배우지 못했기 때문이다. 우리의 교육은 오직 나와 너를 구별하고 경쟁하고 라이벌을 만들어내는 것에만 집착하고 있다. 우리가 자연과 잘 놀 때 환경문제는 저절로 사라질 것이다. 우리가 다른 사람들과 잘 논다면 많이 가진 사람과 가난한 사람 사이의 갈등도 사라지게 될 것이다.

 

만약 지속적인 훈련을 통해 한 사람 한 사람이 경쟁만을 강요했던 정보로부터 초연해질 수 있다면 분명 이 모든 문제들은 사라질 것이다. 우리가 가진 정보를 신성이라는 여과기로 걸러내고, 우리 뇌를 진정한 삶의 목적을 위해 사용할 수 있는 프로그램과 방법이 지금 바로 눈앞에 있다. 필요한 것은 깨달아야겠다는 우리들의 의지이며 선택이다. 이제 잘 노는 방법을 가르쳐 줄 깨달음의 문화운동으로 뛰어들 우리의 선택과 결심만이 남았을 뿐이다.

 

1억이 깨달음을 선택하면 지구가 바뀐다

뇌가 바뀌면 세상이 바뀐다. 이것이야말로 21세기의 사회와 문화를 이끌어 갈 메시지이다. 뇌에 입력된 정보를 조절할 줄 알게 되면, 우리는 육체적, 정신적, 영적 건강을 회복할 수 있다. 더 나아가 스스로 치유자가 되어 다른 많은 이들과 더불어 병든 지구를 치유하게 될 것이다.

 

정치적 차원에서 앞으로 우리가 할 일은 소수의 엘리트를 위한 정치가 아니라 모든 사람들에게 더 나은 미래를 약속하는 진정한 민주주의를 꽃피우는 것이다. 현재 우리 사회가 보여주는 권력을 가진 자와 아닌 자 , 부를 가진 자와 아닌 자 와 같은 식의 대립관계를 넘어서 존경과 이해로 맺어진 새로운 관계를 만들어나가야 한다.

 

경제 활동의 목적도 달라져야 한다. 어떻게 하면 노동력을 효율적으로 배치해 생산성을 높일까, 어떻게 하면 새로운 가치를 창출해 이윤을 얻을까. 이런 것들이 경제 활동의 주된 목적이 되어서는 안 된다. 경제활동은 우리가 영적인 성장이라는 여행을 하는 동안 우리를 위해 봉사하는 하나의 도구이다. 따라서 경제 활동의 목표도 참자아의 의지를 돕는 영적인 목표로 근본적인 방향전환을 해야 한다.

 

과학도 마찬가지이다. 복제인간, 인공지능 같은 최첨단 연구성과들일지라도 인간이란 무엇인가 라는 질문을 되풀이하게 할 뿐 해답을 주지 못했다. 과학이 이러한 질문에 답하지 못하는 까닭은 아직도 인간을 보는 시각이 육체적인 데에 한정되어 있기 때문이다. 인간 존재를 진정으로 알고자 한다면 먼저 인간은 영적 존재라는 사실을 받아들여야 한다. 이제 과학은 인류가 참다운 영적 진보를 하는 데 도움이 되는 구체적이고 물리적인 토대를 마련해야 할 사명이 있다.

 

21세기에 가장 중요한 역할을 할 분야가 바로 교육이다. 교육을 통해 서로 잘 노는 법 을 가르쳐야 하기 때문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기존의 교육이 강요하는 패러다임으로부터 과감히 벗어나야 한다. 우선 나부터 잘되고 보자는 식의 사고, 내가 잘되기 위해서는 남을 제치고 경쟁에서 승리자가 되는 길밖에 없다고 부추기는 생명력 없는 패러다임 대신, 인간의 가치와 인생의 참 목적을 가르치는 새로운 교육 패러다임을 창조해내야 한다.

 

이러한 모든 것들은 결코 전문가만이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우리가 진실되고 순수하게 자기 안에 잠재된 신성을 회복하고, 인류의 영적인 진화를 위한 일에 동참하겠다는 결심을 하면 얼마든지 달성할 수 있는 일이다. 그 동안 우리는 엉뚱한 미로를 만들어내고 자꾸 복잡하게 비틀어서 문제를 해결하려 했기 때문에 코앞에 있는 이 쉬운 방법을 보지 못했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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